세계여행

독일, 튀빙겐(사랑하기 위해 또 슬퍼하기 위해 나는 세상에 낳느니)

2017.12.11

튀빙겐(사랑하기 위해 또 슬퍼하기 위해 나는 세상에 낳느니)
 


독일 남부에 튀빙겐이라는 도시가 있다. 
인구의 40% 이상이 대학생 또는 대학과 관계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도시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는 젊음과 지성이 넘쳐 흐르고 사색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튀빙겐 대학은 1477년 에베르하르트 1세에 의해 건립됐다.
독일에서는 가장 오래 된 3개 대학 중 하나다.
현재 대학은 개신교 신학, 카톨릭 신학, 철학, 법률 등 14개 학부로
나뉘어 지며 학생수는 29,000명, 교직원은 10,000명에 이른다.
강의실은 시내 전반에 걸쳐 이곳저곳에 퍼져 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강의실이 있을 정도로 넓다.
튀빙겐 대학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헤겔, 셸링, 휠덜린 등 삼총사 천재들이다.
그 중 헤겔과 셸링은 철학자가 됐고 휠더린은 정신병의 고통 속에 살다 미쳐서 죽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도시에 남아있는 흔적은 휠덜린이 가장 많다.
휠덜린 슈트라세(길)가 있는가 하면 그의 묘지가 있고 휠덜린 탑이 네카어 강가에 우뚝 서있다.
다리에서 계단을 내려 가면 튀빙겐 최고의 낭만적 장소인 플라타너스 산책로가 나온다.
이 산책로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시민, 관광객 모두가 좋아하는 장소다.
특히 매 년 6월이 되면 에베르하르트 다리와 다리 주변의 산책로는 10,000명 이상이 모이는 장소로 변모한다.
8명이 한조를 이루는 슈터허칸 경기가 열리기 때문이다.
슈터허칸은 장대배를 가리킨다.
한 명은 뒤에서 장대를 밀고 7명의 선수들은 손으로 물을 헤치며 나가는 경기다.
경기는 1956년 6개팀이 참가하며 시작됐다. 지금은 40-60개팀이 참가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대회 시작 전에는 특이한 옷을 입고 뽑내는 의상쇼도 열려 재미를 더한다.





교회 첨탑에서 내려다 본 호엔튀벵겐 성과 튀빙겐 시내의 풍경


튀빙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건축물은 호엔튀벵겐 성이다.
11세기부터 있던 성인데 현재는 선사 시대, 고대 이집트, 로마의 유물들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이용된다.
튀빙겐 대학 학생들은 이곳에서 문화, 역사, 화폐, 과학에 대한 실질적인 강의를 듣기도 한다.
1933년 만들어진 라이카 카메라는 튀빙겐 대학의 베어마이어 교수가 사용하던 것으로 그는 민속학자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라이카는 세계 모든 종군기자들의 필수 카메라였으며 집 한 채 정도의 가격이었다고 한다.
밖으로 나오니 튀빙겐 시내로 내려 가는 길은 운치있고 정감이 넘치는 멋진 길이었다.
성벽길에서 아래로 펼쳐지는 도시의 풍경은 바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슈티프트 교회는 튀벵겐 대학을 설립한 에베르하르트 1세 공작이 건축했다.
그는 23세 때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기사가 됐으며
‘수염많은 에베르하르트’로 불리며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1496년 사망하자 그의 시신은 석관에 담겨 성당에 안치됐다.
마침 성당 성가대의 연습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됐다.
소프라노와 테너가 함께 부르는 혼성 2부 합창소리는 예배당을 은혜의 도가니로 만든다.
옆을 보니 예배당 좌석 끝에 보이는 나무 조각상이 매우 특이해 보인다.
사도 바울, 야고보, 아론, 모세 등의 모습을 새긴 나무 조각상은 1491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설교단 뒤의 3단으로 이어진 종교화(1521)는 뒤러의 제자, 한스 샤우펠린이 그린 것이다.
종탑으로 올라 가면 튀벵겐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장관이다.
네카어 강 위에 장대배는 검은 백조처럼 보이고 사람들은 점 하나 찍은 것처럼 작게 보인다.
홀츠마르크트 광장 계단은 1842년 만들어진 것이다.
광장은 원래 목재를 팔던 곳이었다고 한다.
광장 중앙에 있는 분수는 성자가 마귀를 죽이는 모습의 게오르크 분수다.
분수 아래로는 모래가 있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이 앉아 있다.
한 아이가 국주걱으로 모래를 퍼서 올린다.
그리고는 바닥으로 쏟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모래의 감촉을 느끼고 있다.




헤르만 헤세가 젊은시절 서점 점원으로 있했던
J. J. Heckenhauer(왼쪽에서 2번째 붉은색 건물) 서점



광장을 바라 보고 있는 건물 중에는 헤르만 헤세가 견습생으로 있했던 서점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1895-1899년까지 점원으로 일하며 첫 시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동안 서점은 주중에는 문을 닫았고 주말 3일동안만 12시부터 5시까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6년 1월 6일 완전히 문을 닫았다.
튀빙겐은 580년 역사를 자랑하는 시청사도 고풍스럽다.
시청사 앞 광장은 수많은 카페가 있어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시원한 맥주를 들이킨다.
그 외에도 이곳에는 ‘괴테가 토했다’고 쓰인 건물이 있고,
알츠하이머 병을 발견한 알로이스 알츠하이머가 살았던 건물과,
멜랑히톤이 튀벵겐 대학에 다닐 때 거주했던 건물도 발견할 수 있다.
멜랑히톤은 신학강요(기독교 최초의 조직신학 작품)의 저자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신학자다.
1477년 지어진 곡물창고는 슈바이쳐 중등학교가 되었다가 현재 시의회 사무소가 됐다.




휠덜린이 정신 이상자가 되어
36년을 살았던 휠덜린 탑(노란색 건물)


시내를 빠져 나와 휠덜린 탑이 보이는 네카어 강가로 다시 나왔다.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프리드리히 휠덜린은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는 튀빙겐 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했지만 성직자의 길을 걷지는 않았다.
고통(시를 쓰는 작업)과 늘 함께 해야 하는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가 생계를 위해 가정교사로 취직한 곳은 프랑크푸르트의 야콥 곤타르트의 집이다.
야콥은 은행가로 포악했지만,
부인 주제테 부인은 우아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휠덜린은 주제테를 보고 첫눈에 반하며 혼자만의 불타는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주제테도 그의 뜨거운 눈빛을 보고 운명적인 사랑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무서운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다.
살얼음판을 걷는 두 사람의 사랑은 결국 2년 반만에 끝나고 말았다.
휠덜린은 콘타르트에게 모욕을 당하며 집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래도 두 사람은 2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주제테 부인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미친듯이 시를 썼고
이렇게 탄생한 시는 독일문학의 주옥편이 됐다.
그리고 4년 뒤 휠덜린은 주제테 부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친구를 통해 접하게 된다.
그의 가슴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휠덜린 탑은 그가 정신 이상자가 되어 36년 동안 생활하다 사망한 건물이다.
다행히 천재를 알아 본 한 목수가 그를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지내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후세 사람들은 휠덜린과 주제테 부인을 ‘프랑크푸르트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부른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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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범 - 그대는 어디에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6&v=jyN5X1VmI5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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