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성당과 카라바조의 그림(몰타2)

2017.12.16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성당과 카라바조의 그림
(2)

몰타(Malta)의 수도 발레타에서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다.

카라바조 1608년에 제작한 대작,세례자 요한의 참수를 본 것이다.

성 요한 성당, 작은 예배당(Oratory)에 걸려있는 이 작품의 사이즈는 361cm X 520 cm.

최초의 카라바조 전기를 쓴 줄리오 만치니와 조반니 발리오네에 의하면 카라바조는 실물을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렸으며 제단화는 그림이 걸리게 되는 장소에서 늘 작업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의 참수도 제단화가 내려다 보이는 바로 이 작은 예배당에서 작업했을 것이다.

카라바조는 요한의 목에서 흘러 나온 붉은 피로 자신의 이름(Fr Michelangelo)을 적어 놓았다.

 

황금빛 찬란한 성 요한 성당의 예배실


발레타의 성 요한 성당은 그동안 내가 보아 온 성당 중에는 가장 화려한 성당이다
.
나는 그동안
, 파리의 노틀담 대성당, 프라하의 성 비투스 대성당,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성당,

스위스의 베른 대성당,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등 세계의 수많은 성당을 방문했지만

발레타의 성 요한 성당 처럼 세밀한 조각들과 금빛 찬란한 내벽 장식을 본 적이 없다. 

방문객의 눈을 휘둥글게 하는 이 성당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성당이라 말해도 좋을 듯 하다.

성 요한 성당은 11세기 후반에 설립된 종교 기사단인 성 요한 구호기사단의 교회이다.

이 기사단은 1530년에 몰타 섬에 이주해 왔으며, 제롤라모 카사르에 의해 1578년 성당을 완공했다.

내부 디자인은 대부분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 마티아 프레티(Mattia Preti)의 작품이다.
이탈리아 남부 타베르나(Taverna) 출신의 프레티는 로마와 나폴리에서 활동하다 1659,

성 요한 기사단의 요청으로 몰타를 방문한 후 나머지 여생을 발레타에서 보낸 예술가이다.

그가 그린 작품으로는 성 요한의 일생을 그린 천장화와 레온과 포르투갈 예배당의 그림,

아라곤(스페인) 예배당의 그림, 성녀 카트리나의 신비한 혼인 등 다수가 있다.

성당 안에는 각각 구호 기사단을 이루는 10개의 예배당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네이브(Nave) 에는 405개의 성 요한 구호 기사들의 대리석 묘비가 장식돼 있다.



 405개 성 요한 기사들의 대리석 묘비가 있는 네이브

 

이렇게 황금으로 빛나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성당이지만 성 요한 성당의 최고 보물은

카라바조의 작품, 저술하는 히에로니무스(Saint Jerome Writing, 1607-1608)

그가 죽기 2년 전에 제작된 세례자 요한의 참수(The Beheading of Saint John the Baptist).

카라바조는 미켈란젤로 메리시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의 카라바조라는 작은마을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그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카라바조란 이름은 그보다 앞서 활동했던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구별하기 위해 후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살인자로 도피와 투옥생활을 했으며 필사적으로 사면을 구하다

38세의 젊은 나이에 포르토 에르콜레(Porto Ercole) 에서 숨을 거둔 예술가다.

교황청 사법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살인죄 외에도 최소한 15번의 수사 기록에 등장했으며

일곱번 이상 투옥됐다고 한다.

하지만 카라바조가 그 때마다 쉽게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위대한 그림을
한 점이라도
더 소장하려는 당대 실력자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Saint John the Baptist: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감격하게 되는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의 참수’.


 


카바라조는 시모네 페테르차노의 도제로 화가 수업을 시작했다.

1592, 21 즈음에 로마에 도착했지만 그는 처음 2년 동안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때 처음 그린 작품중 하나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병든 바쿠스(Bacchino Malato).

그는 그림 속에 자신을 끼워 넣기를 좋아했는데,

가난한 로마생활에서 그가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모델은 자기 자신뿐이었을 것이다.

15년이 넘는 작품활동 기간 동안 그는 병든 바쿠스메두사호른 주자등을 든 사람
골리앗 등으로 자신의 그림에 자신의 모습을 등장시켰다.

카라바조가 1595년 부터 마다마 궁으로 들어 가 6년 동안 기거하며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의 후원때문이다.

이후 카라바조는 1606 5 28살인을 저지르고 나폴리로 도망갈 때까지

여러가지 사건에 연루되어 곤혹을 치루지만 그림 그리는 일 만큼은 결코 중단하지 않았다.

쫒기고 있는 나폴리에서도 그는 붓을 들어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

자비의 일곱가지 기적’ 등의 작품을 완성했다.

그 다음해에 건너 간 곳이 바로 성 요한 기사단의 요새인 몰타섬이다.

카라바조는 1608 7 14기사단의 상징인 백색의 팔모 십자가가 수놓인 검은 망토를 걸친다.

그는 기사단장의 재량으로 복종의 기사’ 명예와 함께 황금 깃과 두 명의 노예까지 선물로 받았다.

기사단에 입단하게 된 그의 보답은 현재 성 요한 성당에 걸려있는 두 점의 성화였다.

 

그러나기사가 된 지 겨우 4개월 만에 카라바조는 동료 기사와 싸움을 벌여 독방에 감금된다.

기사단에서는 재명됐고 추방령의 판결이 선언됐지만 그는 탈옥하여 시칠리아 섬으로 도망갔다.

1610카라바조는 로마 교황청에서 자신을 사면을 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사면을 주선한 사람은 교황의 조카인 스피치오네 보르게세 추기경.

카라바조는 보르게세에게 줄 몇 점의 그림을 배에 싣고 로마로 떠났다.

이것이 도피생활을 끝내려고 했던 그의 마지막 여행길이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그에게 벌어졌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실치않다.

다만 그는 1610 7 18일 사망했으며이 사실은 10일 후 로마에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카라바조가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선물할 그림 중에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작품도 있었다.

현재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작품의 모델은 누구였을까?

연민의 모습으로 적장의 머리카락을 움켜 잡고 있는 젊은 다윗도

목이 잘려져 나가 입을 벌리고 있는 골리앗의 모습도 모두 카라바조 그 자신이었다.

 

 글, 사진 :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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