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진군을 시작한다. 그리고선 신속하게 남한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한다. 김 씨는 10대 소녀였다. 꽃다운 나이. 떨어지는 나뭇잎만 보아도 웃음이 나는 나이. 보다 찬란해야 할 때였지만 전쟁 앞에서 소녀의 사춘기 따위는 그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못했다. 38도선 이남의 소녀들은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도망을 갔다. 북쪽의 소녀는 광산에 끌려가 착취를 당했다. 전쟁에 소요되는 물자를 채우기 위해서는 어린 소녀의 노동력조차 아쉬운 상황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국군과 연합군은 북한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김 씨 소녀를 풀어 주었다. 소녀는 고향으로 향했다. 남으로, 남으로. 그러던 중, 미군과 한국군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만났다. 소녀는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군인들에게는 빨갱이였을 뿐이었다. 그저 조금 더 어린 빨갱이. 소녀는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소녀들을 만났다. 그들은 낮에는 군인들의 식사와 빨래 등 뒤치닥거리를 했고 밤에는 군인들에게 불려 다녔다. 소녀들은 군인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분출구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군 위안부.
1953년 휴전. 하지만 김 씨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힘 센 나라들이, 높으신 나리들이 임의로 정해 버린 휴전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녀처럼 고향을 잃은 이들이 휴전선 근처에 모여 마을을 만들었다. 풍진 세월과 함께 소녀는 할머니가 되었다. 복숭앗빛 뺨은 어느새 빛을 잃고 주름만이 지나간 시간을 켜켜이 쌓아 두고 있었다.
96년 겨울, 할머니는 한 박사과정 여학생을 만났다. 한국전쟁 당시를 묻는 학생에게 할머니는 그때 보았던 소녀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여학생이 바로 2016년 오늘까지도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한한 유일한 연구자인 김귀옥 교수.
김귀옥 교수는 김 씨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 위안부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러던 어느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서가 어딘가에 꽂혀 있던 <후방전사>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한다. 대한민국 육군의 공식적인 사료에 한국군 위안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이후 연구는 급물살을 탄다. 그리고 2002년,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움’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공개한다.
이 엄청난 사실은 <아사히신문>과 <오마이뉴스>(링크)에 동시에 보도됐다. 국내 주요 일간지와 뉴스에서도 이 충격을 다뤘다. 하지만 이 사실은 곧 묻혀 버리고 만다. 누구나 열람이 가능했던 <후방전사>는 외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졌고, 김귀옥 교수는 윗선으로부터 입김을 받은 대학 당국으로부터 ‘조심해 달라’는 경고를 받았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당신의 연구 성과는 인정하지만 굳이 민족의 수치를 이렇게 드러내야 겠느냐’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역시 이른바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 단,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였기에 한국 사회가 껴안을 수 있었다(이조차 상당히 험한 과정을 거쳤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처음에는 쉬쉬했던 문제가 한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요소 중 하나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그 프로파간다 안에서 일본 제국의 군인은 더럽고 변태 같은 절대악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의 대척점에 식민지 조선의 여성이 있다. 그 여성은 일본 남성의 야만스러움에 찢겨나갔음에도 여전히 꽃같이 고운 모습의 절대선으로 존재한다. 이런 대립구도 안에서 한국인은 터질듯한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이 땅에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의 힘을 기르는 데에 몸 바쳐 충성할 것을 다짐한다. 바로 한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는 지배적인 시선 중 하나.
이 대립구도 안에는 멋모르던 소녀들을 납치하거나 속여 일본군에 팔아넘긴 조선인이라던가, 피지배인이면서도 일본군 혹은 만주군으로 역할 하면서 위안부 제도의 수혜를 누리던 조선인 남성들의 존재는 잊혀진다. 이들의 존재까지 계산에 넣는 순간,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너무 복잡해 지기 때문. 절대선善과 절대악惡의 대립구도가 그 선명성을 잃어버리기 때문. 한 사회에서 어떤 시각이 절대 다수의 동조를 얻는다면, 아마도 이와 같은 선악의 대립구조 속에서 해당 사회가 절대선의 위치에 포지셔닝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한국군 위안부 문제는 그 자체로 복잡하다. 가해자는 한국 남성. 국가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영웅들을 우리는 차마 더러운 변태 같은 일본 군인과 동일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있었던 사실에 귀 닫고 눈 감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다면 우리가 그리도 증오하는 일본 제국주의와 다를 것이 무언가. 2016년 오늘, 우리는 과연 국가와 이데올로기라는 꺼풀을 벗겨낸 이후에도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중략.
더 많은 정보 http://www.ddanzi.com/ddanziNews/115044941
https://www.ktown1st.com/ktalk/detail/219820
https://www.ktown1st.com/ktalk/detail/219798
휴전이후 미군 위안부 '양색시,' 그들이 벌어 드리는 달러는 당시의 대한민국 양식이었다. 몸 바쳐 고스란히 희생한 누나, 언니들을 위한 기념비 등을 건립하여 전 지구촌에 흩어져 살아가는 '양색시'라는 명칭의 한국인 누나.언니들(한위부)을 위한 위로의 날을 제정하여 그들의 희생적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훤씬 더 감동적인 역사 매김 일 것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