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18회] 일본육사 졸업 후 관동군장교로 만주파견

2018.12.21

재미언론인 고 문명자씨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표지 ⓒ 월간 말 


당시 만주군관학교의 관례는 우등생에게는 일본육사에 유학하는 특전이 주어졌는데 박정희는 이 특전으로 1942년 10월 도쿄 교외에 자리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오랜 꿈이 성취된 것이다. 이름도 순일본식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바꾸었다. 두 번째 창씨개명이다.
 박정희는 일본육사에서도 우수한 성적과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았다. 본과 2년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할 때는 3등이란 우수한 성적이었고, 이로 인해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육군대신상을 수상하였다.

 1944년 4월 일본육사 제57기로 졸업한 박정희는 견습사관으로 임관되어 소만국경지대의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되어 2개월여 근무한 후 같은 해 7월 만주국군 제6관구 소속 보병 제8단으로 옮겨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같은 해 7월 하순경부터 8일 초순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여했다.

팔로군(八路軍)은 중국 화북지역에서 활약한 중국공산당 주력군이다. 1927년 8월 국공합작이 성립된 후 화북에 주둔한 공산군이 국민혁명군 제팔로군이라 개칭하였으며, 화중의 신사군(新四軍)과 함께 항일전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총사령관은 주덕(朱德), 부사령관은 팽덕회였다. 팔로군에는 한국청년들도 상당수 배속되어 있었다. 이후 박정희의 행적이다. 


박정희 큰형 박동희가 1945년 3월에 작성해 구미면 사무소에 보고한 박정희 병적기록표. 오른쪽 하단(붉은 네모선)에는 박정희의 창씨명 '高木正雄'이, 왼쪽 하단에는 신고자 박동희의 창씨명 '高木東熙'가 적혀 있다. ⓒ 자료사진


1944년 12월 23일 일본군 소위로 예비역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보병 8단으로 부임해 단장의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지는 기수로 근무했다. 옌지(延吉)에서 조직된 8단은 간도지구경비사령부 히노 다케오(日野武雄) 소장이 편성한 히노지대(日野支隊)를 기반으로 출발하였으며, 처음에는 주로 동북항일연군과 소련에 대한 작전을 수행했다.

 1938년 7월 말부터 두만강 유역 하산호(湖) 일대에서 벌어진 국경분쟁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 패퇴하는 장고봉(張鼓峰) 사건이 발생한 이후, 만주국 국경경비대를 해산하고 국경경찰대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만주국군 잔류를 원하는 군인들을 기간으로 히노지대를 신설했다.

히노지대는 장비와 전투력이 우수하고 대원들의 일제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는 평가를 받아 8단의 주력으로 재편되었다. 1943년 8단은 중국 관내의 팔로군을 공격하기 위해 러허성ㆍ칭릉현과 싱릉현 일대로 이동해 쭌화 인근의 팔로군 11ㆍ12단에 대한 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집단부락정책을 실시했다.



2005년에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2판)에는 박정희의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나와 있다. ⓒ 도쿄대학 출판부


1944년 4, 5월경부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8단은 칭릉현 서남부의 반벽산(半壁山)을 중심으로 남북 지역에 산재한 팔로군과 교전했으며, 이때 을종 부관으로 8단 예하 각 부대에 작전 지침과 명령을 하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8단에 근무하던 조선인 출신 장교로는 배장 방원철(신경군관학교 2기)과 제1영 본부의 이주일(신경군관학교 1기, 일본육사 56기 해당)이 있었으며, 뒤이어 신현준(봉천군관학교 5기)도 간도특설대에서 8단 연장(連長 : 중대장)으로 전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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