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74회] 유신의 전주곡, 7ㆍ4남북공동성명

2019.05.28

남북조절위 2차회의에서 악수하는 이후락 위원장(우측)과 박성철 북측 위원장 대리


박정희만큼 국가안보와 대북문제를 국내정치에 악용한 위정자도 흔치 않다. 


민족의 숙원인 통일문제를 정략으로 이용하고, 때로는 금방 통일이 될 듯이, 때로는 곧 전쟁이 터질 듯이 상황을 극단으로 몰아갔다.


“실은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중대 방송이 예고된 가운데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내외신 기자회견은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이날 평양에서도 동시에 발표된 남북공동설명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북한을 다녀온 사실을 밝혔다. 이후락은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극비리에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수상과 회담을 가졌고, 북한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했으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고 이후락 부장과 두 차례의 회담을 가졌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 전에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 최두선이 제의하고 이틀 후 북한적십자사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열리게 된 남북적십자회담은 같은 해 9월 20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제1차 예비회담에서는 상설회담연락사무소 설치와 직통전화 가설 등에 합의함으로써 남북간의 철벽 같은 대치상태에 물꼬를 트게 되었다.


불과 1년여 전 야당의 김대중 대통령후보가 4대국 전쟁억제보장론, 남북간의 긴장완화, 기자ㆍ체육인 교류, 서신교환 등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하자, 이를 좌익용공으로 몰아부쳤던 박정희 정권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유엔가입 등을 이유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정부가 국민과 국회에서 한마디 상의도 없이 중앙정보부장이 방북하여 김일성과 만나고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와 면담했다는 발표는 충격과 아울러 정치적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비국교 사이의 나라나 심지어 전쟁상태의 국가 간에도 비밀외교나 비밀접촉은 상례이지만, ‘반공국시’를 내걸고 쿠데타를 하고, 이후 정치의 모든 영역을 ‘반공’에 두었던 박정희의 행태로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밀사 파견이고 7ㆍ4남북공동성명이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기자회견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연합뉴스.


남북 양측은 상호방문을 통한 회담에서, “쌍방은 남북 간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의 고조를 완화시키며 조국평화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합의내용을 발표했다. 


1. 통일원칙으로서 ① 외세의존과 간섭을 배제한 자주적 해결 ②무력행사가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 ③ 사상과 이념ㆍ제도의 차이를 초월한 민족적 대동단결 도모 등에 합의했다. 


2.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고 무력도발과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3.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 제반 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4. 남북적심자회담의 성사를 위해 적극적 협조하기로 합의했다.


5. 군사사고 방지와 남북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 가설에 합의했다.


6.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7. 이 합의사항의 성실한 이행을 민족 앞에 약속한다.


이후락은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하면서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 유엔은 외세가 아니므로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며 ② 전쟁을 방지하는 데 의도가 있으므로 법적 제도면에서 바꿀 것은 바꾸고 보완할 것은 보완해서 세 시대에 알맞게 갖춰나가야 할 것이며 


③ 과거의 반목으로 일관된 남북대결은 대화의 대결로 전환될만큼 과거 체제의 보완 및 법적 뒷받침이 필요할 것이며 ④ 새로 설치될 조절위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을 지원할 것이며 ⑤ 상호교류에는 인적ㆍ물적ㆍ통신은 물론, 사회적ㆍ정치적 교류가 포함된다고 밝히고, 군사정전위의 역할이 휴전협정 문제에 국한되지만 여기서는 군사적,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전쟁방지를 위한 모든 방법이 거론될 것이라고 천명했다.


남북한은 1972년 11월 30일 7ㆍ4남북공동성명의 규정에 따라 남북한 쌍방 간의 합의사항을 추진하고, 남북한 간에 발생하는 제반 문제들을 개선ㆍ해결하며, 조국의 통일문제를 협의ㆍ해결할 목적으로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했다. 이것은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에 양측이 합의하여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1972년 10월 12일 판문점에서 제1차 남북조절위원장 회의가 열렸다. 서울 측에서 이후락 중정부장과 김치열 차장, 정홍진 협의조정 국장이, 평양 측에서 김성철 제2부수상, 유장식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김덕현 노동당 책임지도위원이 대표로 참석했다. 


이날 회담은 7ㆍ4공동성명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상호불신을 해소하는 문제가 논의됐으며, 제2차 회의는 평양, 제3차 회의는 서울에서 열기로 합의했다. 


남북조절위원회는 제1차 회의를 시발로 구체적인 활동을 위한 토의에 들어갔다. 서울측은 남북조절위원회 운영세칙 및 감사위원회 운영세칙, 공동사무국 설치규정 등을 조속히 제정할 것을 제의하고,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분과위원회를 우선 설치하며, 체육ㆍ학술ㆍ통신 등 실현가능한 분야부터 교류를 시작하여 점차 확대해 갈 것을 제의했으나, 평양 측은 쌍방 군비축소, 주한미군 철수, 군비경쟁 지양, 무기 및 군수물자 반입중지, 평화협정체결 등 5개 항목과 남북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의 개최를 제안하는 등 양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선 끝에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1973년 6월의 제3차 회의를 끝으로 조절위원회 본회담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던 중 평양 측이 박정희 정부의 6ㆍ23선언과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유로 들어 남북대화의 중단을 선언했다.


7ㆍ4남북공동성명과 남북조절위원회는 결국 남북이 국민들 몰래 정부 당국자들 간의 밀담을 통해 통일문제를 처리하려 한 한계성과, 자신들의 권력기반 강화에 이를 이용하고 폐기시켜서 남북 간의 불신과 대치를 더욱 심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7ㆍ4남북공동성명은 진정어린 통일의 방법이 아닌 권력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이후의 사태 진행은 박정희는 유신체제로, 김일성은 유일체제로 달리는 고빗길이었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남북대화가 자신들의 권력유지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이를 기꺼이 결렬ㆍ폐기시켰다. 


김일성과 박정희의 한반도 통일을 위한 ‘개인적’ 목표는 그들 양자 모두 자신의 정치적 지도권과 무관하게 통일한국의 조건을 설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일치했다. 


그들은 평화통일이든 무력통일이든 그러한 정책의 추구가 자신들의 권력상의 위치를 강화시키거나 혹은 자신들의 정치적 지도권하에 통일한국을 실현할 수 있다는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되었다면, 그러한 통일정책을 기꺼이 채택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러한 정책추구가 자신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거나 위험에 빠뜨린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기꺼이 그러한 정책을 폐기했던 것이다.

좋아요
태그
인기 포스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