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76회] 정적 김대중 납치 살해 지시

2019.06.02

독재자들의 많은 패악중에는 정치적 라이벌이나 비판적 인재를 제거 또는 살해한 범죄 행위를 들 수 있다. 


히틀러의 만행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고, 무솔리니는 안토니오 그람시를 종신 감옥에 가두고,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외국에까지 암살자를 보내어 죽였다. 이승만은 여운형과 김구 암살의 배후로 지목된다.


박정희에게 김대중은 편치않는 존재였다. 


초재선 때부터 의정활동이 돋보였고 그래서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는 직접 목포에 내려가 국무회의를 열면서까지 그의 당선을 막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3선개헌 반대투쟁에서 그는 김영삼과 함께 야당의 맹장으로 활동했다. 


박정희가 선거에서 가장 힘겨웠던 적은 1971년 4ㆍ27 대선이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과 예비군 폐지, 4대국보장론 등은 하나같이 자신의 정책에 대한 비수와 같은 거센 도전이었다. 하마트면 정권을 빼앗길 뻔 했다. 그래서 증오심에 불탔다. 그의 존재를 방치하고는 유신정권이 순항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더욱이 그는 유신선포 이후 미ㆍ일을 돌면서 반유신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에 머물고 있던 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 당시 통일당 총재이던 양일동이 묵고 있던 호텔 그랜드팔레스 2212호실에서 양일동과 통일당 국회의원 김경인을 만난 뒤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김경인과 함께 방문을 나왔다. 그 순간 바로 옆 2210호실 및 건너편 2215호실에서 5명의 괴한이 뛰어나와 그중 3명은 김대중을 2210호실로 끌고 들어갔고 나머지 2명은 김경인을 양일동이 있던 2212호실로 끌고 들어갔다. 


김대중을 납치한 괴한 중 1명이 마취약에 적신 손수건으로 김대중의 코를 틀어막으며 2210호실로 끌고 들어갔고 괴한들은 그의 목을 짓누르며 두 손을 뒤로 꺾어 로프로 묶으면서 유창한 한국말로 “조용히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괴한들은 그를 끌고 나와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호텔 지하실로 내려갔다.


괴한들이 떠난 뒤 2210호실에는 대형 배낭 2개, 숄더백 1개, 10여m 길이의 나일론 끈, 휴지, 녹슬어 쓸 수 없는 실탄 7발이 들어 있는 권총 탄창 1개, 묽은 농도의 마취제가 들어 있는 약병, 북한제 담배 ‘백두산’ 2개피가 들어 있는 담배갑 등이 놓여 있었다. 


북한의 소행으로 만들려고 소품을 준비한 것이다. 일본경찰은 이곳에서 범인이 남긴 지문을 채취했고 그것이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것임을 밝혀냈다.


김대중을 납치한 괴한들은 호텔 지하주차장을 통해 승용차편으로 어디론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차는 요코하마 주재 한국총영사관 부영사 유영목의 것이었고, 당시 승용차 조수석에는 김동운이 타고 있었다.


납치범들은 오사카나 고베 근처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얼굴을 포장용 테이프로 감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 보트에 태워 30~40분쯤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대형 선박에 옮겨싣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인계했다. 그 배는 중앙정보부의 공작선인 536톤짜리 용금호였다. 용금호는 그해 7월 29일 입항하여 그곳 외항에 정박해 있었다.


김대중을 넘겨받은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급히 출항한 뒤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가서 몸을 새롭게 묶기 시작했다. 손발을 꼼짝 못하게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다시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킬로그램이 되는 돌을 달았다. 


마지막으로 등에 판자를 대고 몸과 함께 묶었다. 그들은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이불로 싸서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 등의 말을 주고받았다.


얼마 후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을 느낌과 동시에 굉음을 들었다. 그 순간 선실에 있던 자들은 “비행기다!” 하면서 뛰쳐나갔고 배는 매우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비행기의 폭음소리도 되풀이 되었다. 이런 상태가 30분 이상 계속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김대중은 어느 항구에 도착하여 앰뷸런스에 태워지고 수면제에 의해 잠이 들었다. 잠을 깬 순간 그는 2층 양옥에 있었다. 다시 어두워진 다음, 승용차에 태워져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 내려졌다. 납치된 지 129시간 만인 8월 13일 저녁 10시 30분경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국경을 넘나들면서 야당 정치지도자를 납치해 오는 이런 일은 최고권력자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나중에 김대중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해외에서 유신체제를 계속 비판하면서 1973년 7월 6일 재미교포들의 반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회의(약청 한민통)를 결성, 초대 명예회장이 되고 일본에서도 8월 13일 도쿄 한민통의 결성을 준비하자 박정희가 자신의 납치 살해를 중앙정보부에 지시했다는 것이다.


납치사건이 발생하자 박 정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 정부의 개입설을 완강히 부인했다. 일본 경시청이 사건현장에서 범인 김동운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관련자의 출두를 한국 정부에 요구해도,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이에 따라 일본 내에서는 ‘국권침해’에 대한 비난여론이 대두했고, 그에 따라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던 한일관계가 냉각상태에 빠져 들었다.


이후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 간의 막후절충을 통해 관계정상화가 시도되어 △ 김동운 1등 서기관의 해임 △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동에 대한 면책 △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 등에 합의, 사건발생 86일 만에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결말지어졌다. 


이로써 무기연기되었던 한일각료회의가 다시 열리고 중단된 차관사업도 재개되었으나, △ 주권침해 △ 중앙정보부 관련설 △ 범인출두 △ 김대중의 원상회복 문제 등은 사건진상과 더불어 영구미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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