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75회] 유신의 별동대 ‘통대’와 ‘유신정우회’

2019.06.01


한 정치학자는 박정희의 정치욕망을 네 가지의 객관적 요인과 다섯 가지 주관적 특성으로 정리한다. 


객관적 요인


공생연계조직에 의한 적극적 지원

정치적 안정 및 통치기구 형성의 필요성

미국과 일본의 지원

연령 및 육체적 활력


개인적 특성 


원칙보다 기꺼이 권력을 앞세움

정치적 위기에서 자신의 정치적 핵심동료를 속죄양으로 삼음 

자립과 외적 의존을 조화시키는 능력

내부적인 정치적 이익을 위해 외부적 위협을 이용하는 능력

경제발전으로 정치적 업압을 보상해 주는 능력.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실질적으로 뒷받침한 것은 중앙정보부와 국군보안사령부 등 권력기관이었지만, 형식상으로는 통일주체국민회의와 유신정우회였다.


유신헌법에 의해 태어난 이 두 기관은 정치적으로 박정희의 친위사단 역할을 맡았다. 실권도 별로 없는 친위사단은 어용기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 제35조에 의하여 조직되었다. 


“조국통일의 신성한 사명을 가진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을 표방한 약칭 ‘통대’의 주요 임무와 권한은 대통령과 정족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국회의원 선거는 대통령이 일괄추천한 후보자가 전체에 대한 찬반투표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선거’라고 부르기도 무색할 지경이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형식적이나마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중요 통일정책의 심의와 국회가 발의한 개헌안의 의결, 확정권을 갖고 있었다. 


1972년 12월 15일 실시된 제1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를 통해 당선된 2,359명의 대의원들은 12월 23일 첫 회의에서 단독후보로 나선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선거결과를 보면 2,359명의 통대의원 중 2,357명이 박정희 후보를 지지했고 단 2명이 무효표를 던졌다. 1978년 7월 6일 유신 제2기 통대의원들에 의한 대통령선거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2,578명의 통대의원들은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박정희 후보를 지지한 통대의원이 2,577명이고, 단 1명이 무효표를 던져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3분의 1의 추천에 대한 동의 외에는 달리 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유신체제 어용기구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1980년 10월 27일 신군부에 의해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해체되었다.


유신정우회는 1973년 3월 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이 구성한 준정당의 원내교섭단체를 말한다. 유정회의 성격은 정치적 조직이면서 정당도 아니고 사회단체도 아닌 특수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활동목표를 유신헌법 체제의 수호 및 발전, 국회의 직능대표적 기능에 둔다고 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대통령이 국회를 장악하기 위한 원내 전위부대로서 거수기의 역할을 맡았다. 일제 말 총독의 자문기구인 대정익찬회와 비슷했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른 지 1주일 후인 1973년 3월 3일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로 선출된 국회의원 후보 73명과 예비후보 14명의 명단을 확정, 이를 통대회의에 일괄추천했다. 후보자의 소속 분야별로 분석해 보면 징계인사 20명, 학계 7명, 교육계 3명, 예비역 장성 8명, 여성계 8명에 사회각계 4명으로 되어 있었다. 


추천 후보 중에는 ‘유신헌법’ 제정에 기여한 한태연ㆍ갈봉근 교수를 비롯 각계의 어용인사들이 참여했고 특히 김용성ㆍ함종빈 등 야당인사들도 끼어 있었다.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들은 대통령 비서실이 추천해 박정희의 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박정희 정권은 당시 유신체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었던 지식인들을 상당히 많이 기용했다. 유정회 국회의원이 된 대학교수는 제1기 11명, 제2기 21명, 제3기 21명이었고, 유신정책심의회의 조사연구 교수는 모두 70명이었다.


1972년 11월 21일 '유신헌법' 국민투표 하는 박근혜.<경향신문>


이렇게 박정희 정권은 유정회 국회의원을 빌미로 권력지향적인 대학교수, 학자, 문필가, 언론인들을 체제 내로 편입시켰고 이들은 박정희 정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국회 내에서뿐 아니라 국회 밖에서도 개인적으로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후보자 전체에 대한 찬반투표를 거쳐 제9대 국회의원이 된 ‘유정회 의원들’은 원내에서 정치적 단합과 보조일치를 위해 독자적인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키로 하고 창립총회를 열어 ‘유신정우회’를 발족시켰다. 원내총무단, 대변인, 회장 등을 비롯 정책연구실, 행정실 등 정당조직에 준하는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유정회 소속 국회의원의 임기는 3년이었으므로 유정회도 3년을 1기로 3년마다 개편되었으며 3기까지 지속되다가 1980년 10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와 함께 해체되었다.


박정희는 자신을 99.9%의 지지율로 선출해준 통일주체국민회의, 원내 제1교섭단체 유정회와 제2교섭단체 공화당을 거느리고 유신체제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국민의 저항은 제9대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신헌법에 의한 제9대 국회의원선거가 1973년 2월 27일 실시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로 선출된 국회의원 73명을 제외하고 국회 정족수의 3분의 2를 뽑은 이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은 총 투표수의 38.7%를 얻었고 신민당과 통일당을 합한 야당은 42.7%를 득표했다. 그러나 당선자 수는 여당이 73명, 야당이 54명으로 득표율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나타냈다. 유신체제의 폭압구조에서도 국민은 야당에 더 높은 지지율을 보인 것이다.


1973년 3월 21일 제9대 국회가 개원할 당시의 원내 의석분포는 유정회가 73석으로, 공화당 71석, 신민당 52석을 제치고 원내 제1교섭단체가 되었다. 그러나 유정회 의원은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출된 국회의원이 아니란 점에서 야당은 물론 지역구 출신인 공화당 의원들로부터 차별과 냉대의 차가운 눈총을 받았다. 


이로써 유신체제의 국회는 ‘시녀국회’, ‘들러리 국회’라는 비난을 받았으며, 야당은 사실상 정권장악의 가능성을 상실한 불임정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한국민주주의의 극심한 시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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