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78회] 서울대 최종길 교수 의문사

2019.06.10

압제에는 저항이 따른다. 고구려와 발해가 망하고 한민족이 반도국가로 전락하여 국력이 약해지면서 부단한 외세의 침입을 받았다. 그때마다 한민족은 피어린 항쟁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지켰다. 지배층이 외세에 투항하거나 영합할 때에도 민중들은 결코 이를 따르지 않았다. 한국민중은 압제와 불의에 저항하는 강인한 DNA를 갖추었다.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가운데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1인영구집권체제를 출범시켰다. 언론ㆍ사법ㆍ야당 할 것없이 모든 비판세력을 평정시켰다. 정치적 라이벌 김대중을 납치해다가 동교동 자택에 유폐시켰으며 그의 측근ㆍ비서들을 모조리 구속하여 손발을 잘랐다. 


보안사령관 윤필용이 “이후락과 작당하여 박정희가 노쇠하였으니 물러나게 하고 다음은 ‘형님’(이후락)이 해야 한다는 불경한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정보에 따라 그를 부정축재자로 몰아 사회적으로 매장시켰다. 


1973년 4월 29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특정범죄 가중처벌 위반 행위에 대한 선고에서 '윤필용 사건'의 당사자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맨 오른쪽)이 재판 내용을 듣고 있다. 


박정희는 한국중앙정보부로 대표되는 정치적 통제기구의 가차없는 활용을 통해 자신의 (실제적 또는 잠재적) 정치적 적을 거세하면서 자신의 권력을 성공적으로 조직하고 제도화해 냈다. 그 궁극적인 결과 공화당 기구, 정보 및 방첩기관, 새마을운동요원, 예비군, 그리고 재향군인 등의 박정희에 충성하는 다층적인 조직적 하부구조가 생겨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이 스며들었다. 무장한 군대는 ‘사병화’되었고 무력한 야당들은 더더욱 마비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에 뒤이어 느슨한 형태로 존재해 왔던 대학, 언론, 학생의 반(反) 박정희연합은 더욱 지리멸렬해졌다. 학자들은 더 어용화되었고 언론 및 대중매체는 더욱 더 입을 굳게 다물었으며, 학생들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강력하게 박정희체제의 명령 앞에 도열했다. 


유신쿠테타가 발생한 지 1년 만인 1973년 10월 2일 서울문리대생 250여 명은 교내 4ㆍ19기념탑 앞에 모여 비상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체제 확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를 벌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계기로 유신선포 이후 최초로 학생들이 ‘유신체제 비판불용’이라는 금기를 깨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날 학생들은 △ 정보ㆍ파쇼통치 즉각 중지와 자유 민주체제 확립 △ 대일경제예속관계 즉각 중지 및 민족자립경제 확립, 국민생존권 보장 △ 중앙정보부 즉각 해체와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 △ 기성 정치인과 언론인의 각성 촉구 등 4개항을 결의하고, 2시간여 동안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의 시위는 유신체제 출범 이후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져 있던 학생운동권 및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문 발표, 신문사와 방송국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으로 이어지는 반독재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1973년 11월 5일 서울 종로 YMCA에서 시국간담회를 하고 있는 재야인사들. 왼쪽에 서 있는 이가 함석헌, 바로 옆에 안경쓰고 앉은이가 지학순 주교, 그 옆이 이호철 소설가, 가운데 태극기 아래 서 있는 이가 김재준 목사. 오른쪽 아래부터 김지하, 계훈제, 법정 스님, 천관우. 동아일보DB


서울대학 문리대에서 점화된 학생시위는 11월 말에서 12월 초에 걸쳐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일부 대학에서는 가두 진출로 격화되었고, 경찰과 투석전과 최루탄의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고등학교까지 확대되었다. 정부가 시위 주동 학생들을 대거 구속, 제적하면서 이들의 석방과 학원의 자유가 새로운 이슈가 되고, 정치적으로는 정보 파쇼통치와 유신철폐가 여전히 핵심 이슈였다.


학생들의 시국선언문과 시위에 각성한 기자들은 언론자유 수호 선언투쟁에 나서고, 노동자들은 노조 결성의 자유와 임금현실화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의문의 추락사로 숨진 최종길 교수


서울대 법대에 재직 중이던 최종길 교수가 10월 16일 중앙정보부에 출두했다가 간첩혐의로 구속되어 7층 심문실에서 창밖으로 투신자살했다고 발표되면서 “김대중 납치사건”과 함께 ‘유신독재의 마각’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혹사건이 벌어지자, 대학과 재야인사들의 진상규명 운동이 전개되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듬해 추모미사에서 공개적으로 이 사건을 권력의 개입에 의한 살해라고 주장하였다.


최 박사는 교수회의에서 정부에 비관적이었다는 이유로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고 있던 터였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최 박사는 기관원에 의해 납치됐다. 그리고 한 주일쯤 뒤, 한국과 미국신문에 당국의 발표내용이 실렸다. 최종길은 공산주의자이며, 기관에서 조사 받던 중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추락사했다는 거였다. 내과의사였던 최 박사의 부인이 시체 인도를 요구했으나 이미 매장이 끝났다는 통고만이 날아왔다. 의혹투성이 사건이었다.


최종길 박사는 내 제자였다. 나는 그를 잘 알고 있었고, 그의 성실성과 총명함을 높이 사 서울대 법대 교수로 추천했었다. 단호히 말하건대 최 박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자살할 사람도 아니다. 바라건대 한국에 민주화의 꽃이 피게 되면, 이 젊은이의 일이 진실 그대로 세상에 알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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