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85회] 박정희 저격 미수와 부인사망

2019.07.03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29주년 기념식이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이날은 착공 3년 4개월여만에 서울 지하철이 개통되는 날이었다. 박정희는 어느 때보다 자부심을 갖고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기념식은 박정희가 경축사를 낭독한지 얼마 후 아래층 맨 뒷줄 중앙 부근에서 ‘탕’ 하는 총소리가 울렸다. 대통령은 총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경축사를 계속 낭독했다. 


일본 출신의 재일교포이자 1974년 8월 15일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를 저격한 암살자. 일본 이름은 난조 세이코(南條世光).


이때 두 번째 총소리가 울렸다. 한 사나이가 아래층 중앙 뒷줄에서 단상을 향해 뛰쳐나오면서 계속 총을 쏘아댔다. 탕! 탕! 탕! 시간은 오전 10시 2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 언론의 보도 내용이다.


10시 23분, 청중들이 연단 위 박 대통령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순간, 1층 장내 뒤쪽 해외교포석 끝부분에서 1m 70cm 가량의 검은색 양복에 안경을 쓴 괴청년이 불쑥 일어났다. 그는 B, C석 사이 복도로 5m 가량 무대 쪽으로 뛰어나가다 무대를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순간 ‘따앙-탕’ 하는 금속성 2발이 장내를 뒤흔들었다.


뒤쪽에서 청중들이 웅성거리는 순간 범인은 15도 가량 경사진 통로를 17~18m 가량 뛰어내려갔다. 권총이 들려 있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받치고 오케스트라 피트 앞까지 이르렀을 때 대통령은 연단 뒤로 몸을 피했다. 범인은 연단 뒤쪽 육여사 좌석을 향해 다시 2발을 더 발사, 그 순간 독립유공자 좌석에서 발을 내밀어 범인은 오케스트라 피트를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에는 권총을 연단 쪽으로 향해 든 채 쓰러졌다. 


권총은 오케스트라 피트 반대쪽으로 떨어졌다. 연단 위에서는 4, 5명의 경호원들이 대통령의 연설대를 둘러쌌으며, 다른 경호원들은 쓰러진 범인을 덮쳤다. 이때 육영수가 좌석에 앉은 채 고개를 왼쪽으로 떨구었다. 연단 위 경호원 2명과 독립유족 좌석의 50대 부인 1명이 연단 위로 뛰어올라가 로열박스의 육영수를 부축, 안아서 무대 위 통로로 황급히 나갔다. 거의 같은 순간에 합창단석에서 여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합창단원 장봉화(18세) 양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다. 사진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지는 가운데 범인이 경호원들에게 양팔과 양다리를 들린 채 밖으로 끌려나갔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에서 문세광이 쏜 총탄에 육영수 여사가 피격되는 순간. 


육영수는 지체없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으로 옮겨지고, 범인이 잡혀나간 후 박 대통령은 연설대에 다시 나타났다. 장내가 떠나갈 듯한 박수가 터졌다. 


박정희의 경축사가 다시 계속되었다.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의 기본원칙은…….”


육영수는 이날 오후 7시 서울대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육 여사는 영부인의 자리에 있으면서 항상 소박하고 성실한 내조자로서 한국의 주부상을 내외에 심어주었다. 그리고 박 대통령에게는 청와대 안의 야당으로서 항상 바른말을 하여 국민의 소리를 대통령에게 전달했으며, 자신은 사회의 그늘지고 소외된 곳을 찾아 이들을 도와주는, 무척 심성이 착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한다. 


육 여사의 이와 같은 활동으로, 박정희의 정치적 독재와 억압에 반대하고 비판하던 야당이나 국민들도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는 대단한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8ㆍ15사건 이후 세간에는 육영수를 쏜 범인은 문세광이 아닐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박정희의 여성관계와 관련되어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권력기관의 소행이라는, 아주 구체적인 내용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사건이 발생한 지 16년이 지난 1989년 8ㆍ15사건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한 수사관의 양심선언을 통해 당시 사건의 충격파 속에 가려졌던 의문점이 제기되었다. 당사자는 사건 당시 수사본부 요원으로서 당시 현장검증을 담당했던 수사관 이건우(89년 당시 67세) 씨이다. 이씨는 사건 당시 서울시경찰국 감식계장(당시 계급은 경감)으로 83년 6월 30일 정년퇴직했다. 


이씨가 뒤늦게 “육영수가 문세광의 총에 죽은 것이 아니다”라는 진상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경찰중립화’의 신념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89년 9월 “육영수 암살 진범 따로 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이씨가 제기하고 있는 의문은 범인 문세광이 대통령이 연설하는 그 삼엄한 경축식장에 어떻게 권총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으며, 대통령 연설이 시작된 이후에 어떻게 좌석까지 찾아가 앉을 수 있었는가 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또 문세광의 가슴에는 비표(花章)가 달려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의문에 포함된다.


이날 8ㆍ15기념행사장의 입장은 오전 9시 50분에 완료되었다. 그런데 문세광은 허용시간보다 23분이 늦은 10시 13분에 입장했다. 문세광은 정문에서 경호관들의 안내를 받으며 뒤늦게 입장했다. 정문 입구 안내대에는 대통령경호실의 경호관이 한 사람 있었고 그 옆에는 정보과장이 있었다. 이날 문세광은 입장하면서 경호관의 검문을 받았다.


“누구십니까?” 


경호관이 물었다.


“보쿠 니혼 다이시깡 가리기마시다(나는 일본 대사관에서 왔습니다).”(일본말 대답이었다)


경호관은 아무런 검문 없이 문세광을 통과시켜 옆에 있는 중부서 최정환 정보과장에게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아무리 주한외교사절이라 해도 일본대사관에 온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참석하는 식장에 그토록 쉽게, 그것도 입장이 완료된 후에 참석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일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경축식장에 초청받지 않은 일본 대사관 직원이 들어올 수 있었는가. 외빈이나 외교사절의 경우 초청자 명단이 비치되고, 참석자는 이 명단과 대조하여 입장시키는 것이 관례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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