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84회]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런 재판

2019.07.03

4.9인혁열사 추모제가 열린 현대공원묘역에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인사들을 바롯해 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다가 돌아가신 17명의 영정이 모셔졌다. ⓒ조정훈


1995년 4월 25일 문화방송이 사법제도 1백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15명에게 보낸 설문조사에서 인혁당사건 재판이 “우리 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런운 재판”이었다고 응답하여 법조인들도 이 사건이 정상적이지 못했음을 시인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8명의 생명을 빼앗은 것은 물론 많은 유능한 인재들을 긴 세월 동안 감옥에 유폐시켰다. 이들의 선고내역을 보면, 무기징역 전창일ㆍ김한덕ㆍ나경일ㆍ강창덕ㆍ이태환ㆍ이성재ㆍ유진곤, 징역 20년 김종대ㆍ정만진ㆍ조만호ㆍ이재형, 징역 15년 이창복ㆍ황현승ㆍ임구호ㆍ전재권, 징역 5년 장석구 등이다. 


이들 중 장석구는 1975년 10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유기수 석방, 1982년 8월 15일 무기수 20년으로 감형, 1982년 12월 24일 형집행정지로 20년형 유기수 석방 등의 조치를 통해 출소했다. 


출옥 후 전재권과 유진곤은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1986년 5월 7일과 1988년 5월 5일 각각 병사했다. 그리고 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박현채 교수는 95년 8월 15일 사망했다. 


인혁당 사건은, 최고권력자 박정희가 이 사건을 자신의 집권기간 중 저지른 최대의 실책이라며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고 인정하고, 국제법학자회의가 최종 판결이 난 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했으며, 이 땅의 판사들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으로 인정하고, 7, 80년대 반독재투쟁의 선두에서 국민의 양심을 대변해온 기독교와 천주교의 인권기관들이 한결같이 ‘조작’으로 단정하고 있다.


또한 당시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배후실체로서 인혁당의 존재를 지금도 부정하고 있고, 특히 공소과정에서 민청학련과 인혁당의 관련이 객관적 자료나 문건에 의해 입증되지도 않았다. “내가 죽은 이유는 민족민주운동을 한 죄뿐이다”라고 쓰인 이수병씨의 유언장을 통해서도 이 사건의 실체는 짐작되고도 남는다.


박정희 정권 시절 최악의 공안조작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의문사위원회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의 조사를 토대로, 2007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1심에서 490억 원의 배상판결을 받았고, 상당한 액수를 가집행 받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자가 과잉계산 되었다며 배상액수를 대폭 삭감하였고, 국가는 이를 토대로 배상금을 받은 유가족과 사건 관련자 77명을 상대로 ‘부당이득’ 251억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인혁당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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