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 시절에 영등포에 있는 OB맥주 공장에 견학을 간 적이 있다. 생산공정 견학과 함께 주어진 혜택은 공장 구내에서는 제공된 맥주를 마음껏 마시라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마련된 테이블 위에 쌓여 있는 맥주를 신나게 마신 후에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진출했던 기억이 있다.
요즈음은 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독주에 강한 체질이라서 술집에서는 양주, 식당에서는 소주를 즐겨 마시기 때문에 맥주는 사실상 밤문화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없는 술이었다.
그러다가 미국에 살게 되면서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약한 술인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언젠가 한국에서부터 기자 생활을 하다가 미국에 온 분에게서 들은 말이 기억난다. 자기가 일찍 미국에 오지 않았으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날마다 독주를 들이 마시는 밤문화가 한국사회를 휩쓸고 있던 시절이었다. 동 시대에 똑같은 경험을 한 나에게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었다. 실제로도 대관청 교섭 업무를 하던 내 직장동료는 결국 술 때문에 요절하고 말았다.
미국에 와서는 말로만 듣던 미국맥주 Budweiser 를 시작으로 해서 Miller, Busch, Michelob 등 여러 종류를 마셔 보았으나 뒷끝에 남는 케미칼 냄새같은 것 때문에 결국 정을 붙이지 못하였다. Heineken 도 마셔 보았으나 위장을 훑어 내리는 듯한 지나친 싸아함과 다른 맥주에 비해 비싼 가격 등으로 역시 멀리 하게 되었다. 미국 맥주로 그나마 가장 선호하게 된 것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후에 발견한 Coors 맥주이다. 이 맥주는 한국맥주에 가장 근접한 맛을 내는 미국맥주로 생각된다. 중남미계 직원들과 어울리게 된 이후로는 Corona 도 즐기게 되었다. 멕시코에 Corona가 있다면 과테말라에는 Gallo 라는 토속맥주가 있는데 이 맥주도 맛이 괜찮다. 중국식당에 가게 되면 반드시 칭따오 맥주를 시키는데, 이 맥주도 맛이 좋다. 언젠가 칭따오에 출장을 가서 일주일 내내 칭따오 맥주를 마신 기억이 있다. Guinness 흑맥주도 가끔 마시기에는 좋다.
그러다가 최근에 문득 수십년전에 애음하던 OB맥주가 생각나서 한남체인에 가서 한 팩을 사 온 이후부터 다시 OB로 돌아가게 되었다. 헤르만 헷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에 보면 골드문트는 수도원을 떠나 평생을 외지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며 돌아다니다가 늘그막에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와서 삶의 안정을 찾고 생을 마감한다. 인간의 삶의 본질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드물 것인데, 이는 맥주에도 해당한다는 경박한 상상을 해 본다.
최근에는 테라맥주에 대한 광고가 자주 보이길래 어떤가 해서 마셔보았다. OB와는 달리 보리냄새가 강렬하다. 한 동안은 OB와 테라를 번갈아 가면서 마셔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