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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가치있는 삶

2020.01.02

     


               가치있는 삶  


  아주 오랜만에 P여사님이 필자를 찾았다. 몇 년에 거쳐 가끔 필자를 찾으셨는데 최근에는 뜸했다. 여사님은 산호세 인근 산타크루즈에 오랫동안 거주해 오신 분인데 몇 년에 한번씩 LA에 볼일을 보러 내려오시면 꼭 필자를 만나고 가곤했다. 여사님은 庚寅년 己卯월 庚戌일 庚辰시에 태어난 命을 지닌 분이다. 처음 필자와 마주 앉았을 때 필자가 건넨 첫 이야기는 “사주팔자 속 공방살이 중첩하니 오랫동안 홀로 지내셨고 운명적으로 남들에게 베푸는 삶을 사실 운명이니 남들을 위해 봉사하는 선업(善業)을 지속적으로 쌓아 오셨군요.” 였다. 필자의 이야기에 잠시 놀라시더니 “제 사주팔자가 그렇게 생겼나보죠? 제가 이렇게 사는 것도 다 운명인가 보군요!” 라고 하시더니 가만히 웃으셨다. 


P여사님은 교육자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인성교육을 제대로 받아 반듯하게 성장하신 분이다. 머리도 총명하여 모 여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에 당시의 고루한 사회 분위기에 따라 몇 년간 신부수업을 받다 미국에 유학중이던 남편을 만나 결혼 한 뒤 미국에 건너오셨다. 남편은 NASA에 근무하였고 여사님은 집에서 살림하며 시부모님을 모셨다. 부부는 사이가 매우 좋아 주위에서 잉꼬부부로 부러움을 받았는데 이상하게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사이가 너무 좋으니 아무 문제 없었는데 시부모님의 성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이문제로 스트레스 받는 것 외에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한 결혼 생활이 계속 되었는데 이 행복이 계속되지 못한다. 


아침에 출근하던 남편이 프리웨이에서 교통사고로 급사하고 만것이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리가 도저히 믿기지 않아 꿈만 같았지만 현실이었다. 결혼생활 8년 만에 졸지에 아이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어 있었다. P여사님은 시부모님을 친부모님처럼 모시고 계속같이 살려고 했으나 시부모님들 뜻은 단호했다. “죽은 남편 연연하지 말고 니 갈 길가라! 자식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끈으로 어떻게든 너와 우리가 연결되겠지만 그런 끈도 없으니 이제 우리는 아무 관계없는 사이다!” 돈 한 푼 주지 않고 살던 집에서 무조건 나가라고만 하는 시부모님이 무척이나 야속했지만 어쩌지 못하고 시댁에서 쫓겨난다. 혹자는 재판을 해서라도 남편에게 남아있는 권리를 행사하라했지만 죽은 남편이 저승에서 가슴아파할 것 같아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젊디젊은 나이에 일가친척 하나 없는 미국 땅에서 여자혼자 산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색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젊은 과부 건드려보려고 집적대는 사내들이 너무도 많았다. 젊고 그럴싸한 조건의 남자라면 그런대로 참을만한데, 말마따나 바닥양아치에 조건도 안되는 유부남 늙은이들조차 집적거리는데는 자존심이 너무 상하고 속상해서 자괴감에 며칠씩 앓아 눕기까지 했다한다. 하지만 이 모든 어려움을 오로지 신앙생활로 극복해나갔다. 교회에서 조차 집적거리는 양아치들이 득실거렸고, 어렵게 이를 이겨나갔지만 어떤 곳의 경우 명색이 목사라는 놈까지 능글맞게 접근해오자 질겁을하고 이후 교회는 나가지 않고 뜻이 맞는 신도들끼리 모여 가정에다 작은 예배당을 만들어 믿음생활을 계속해나갔다. 이런 생활을 하던중 뜻밖에 목돈이 생겼다. 한국에 계신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P여사님 앞으로 남긴 유산이었다. 


적지 않은 큰돈이 생기자 이 돈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도움이 필요한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 이 돈을 쓰기로 결정하고 나자 마음이 무척이나 기쁘고 편안했다고 한다. 시골 한적한 숲속에 집과 20에이커에 달하는 땅이 있는 부지를 발견하고 이를 사들였다. 그리고 정말 어려운 처지에 있는 갈곳없는 이들을 수소문해서 이곳에 데려오기 시작했다. 장애인, 정신지체아, 회복불능할 정도의 마약중독자, 남편의 구타에 아이들 데리고 도망쳐 나온 가여운 여인 등등 선진국이라는 복지의 땅 이곳 미국에도 이렇게 저렇게 구호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방치된 불쌍한 이들이 많았다. 흑인, 백인, 한인, 아시안, 남미인 등 인종의 구별 없이 도움이 필요한 이는 이곳에 들어와 살 자격이 있었다. 조건은 자신의 능력껏 농장 일을 도와야한다는 것 하나였다. 


걷지 못하는 이는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돕고 신체 건강한 이는 밭을 가꾸어야 하며 절대 농장 내에서는 술, 담배, 마약은 금물이었다. 함께 예배를 보고,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입고 모든 것을 차별 없이 함께 나누는 생활이었다. 처음 2~3명 하던 식구가 시간이 흐르자 20~30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천불어치 시장을 봐와도 불과 며칠이면 이런저런 부식이 동이 나고 물자소비가 엄청났다. 물론 농장에서 나는 생산물을 일부는 먹고 일부는 팔아 이런 비용에 충당했으나 늘 턱없이 부족했다. 사비를 탁탁 털어 이 비용을 댔고 후원자들을 찾아 후원을 받아가며 겨우겨우 어렵게 이 대식구의 생활을 꾸려나갔으나 어떤 이들은 실컷 도움을 받고나서 “지금껏 내가 뼈 빠지게(?) 일한 임금 내놓아라! 너는 악덕업주다!” 라고 하며 행패를 부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들 앞에서 회의에 빠지기도했다 한다. 


“좋은 일 하기도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P여사님이 필자에게 여러 차례 토로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P여사님은 지금도 이런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한 번 LA에 나오려면 식구들 뒤치닥거리에 몇 달을 벼르고 별려야 올 수 있을 정도로 꽉 메인 고단한 생활이지만 P여사님은 늘 웃음을 잃지 않는다.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계신 것이다.


 

                    자료제공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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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 2140 W. Olympic  Blvd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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