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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孔子와 運命論(공자와 운명론)

2020.08.29




           孔子와 運命論(공자와 운명론)


 동양의 성현이라 불리는 孔子도 운명을 매우 신봉하였다. 공자는 지식이 깊고 또 다방면에 방대한 논리를 지닌 사람이다. 세상에는 공자를 추종하고 따르는 이가 너무도 많았다. 공자는 자신의 이런 깊은 경륜을 세상에 나가 마음껏 펼쳐보기를 원했다. 즉 출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여 온갖 고생을 다하며 여러 나라를 두루두루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자신의 정치주장을 펼쳐나갔다. ‘내가 이렇게 지식이 깊고 경륜이 높은 사람이니 나를 채용해 달라’는 뜻이었다. 허나 아무도 그를 채용해 주지를 않았다. 자신의 뜻을 펼쳐보기 위해 그토록 피나는 노력을 하였고, 자신의 학문의 깊이와 경륜이 세상 어느 이와 견주어도 높고 깊었지 모자라지 않았는데 결국 실패를 하자 한탄을 하였다. 


“어찌 운명의 신은 나에게 이토록 가혹하단 말인가?” 이곳저곳 취직처를 찾아 다니다보니 어느덧 이때 공자의 나이 오십이 다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70대 노인에 도달한 셈 인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내 나이 50에 천명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즉 지천명(知天命)인 것이다. 이때까지는 운명이라는 것을 느끼거나 알지 못했다가 이때야 운명의 실체를 깨달은 것이다. 이때 공자는 천명(天命)을 깨닫고 운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천명을 알고 나니 천명이 두려워 진다”라는 말속에 그의 생각을 느낄 수 있다. 이후 제자들과 더불어 운명론을 강조한다. “사람이 살고 죽음에는 일정한 명이 있고 부귀하게 되느냐의 여부는 하늘에 달려있다. 따라서 命을 모르는 자는 군자(君子)가 될 수 없다. 


군자(君子)는 쉬운 것에 바탕하면서 命을 기다리고, 소인은 어려운 것을 저지르면서 요행을 바란다.” 이 말속에는 한사람의 삶과 죽음, 부귀와 빈천 등은 모두 일찌감치 결정되어 있기에 군자가 되고자 하면 이 명을 알지 않고서는 안되며, 군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뜻이 들어있다. <孔子集語>(공자집어)에 보면 이런 말도 있다. “옛날 성인과 군자는 널리 배우고 깊은 생각을 가졌는데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찌 나만 이런 경우를 당하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어질거나 어리석은 것은 타고난 재주이고 그것을 제대로 쓰느냐 못쓰느냐 하는 것은 그사 람 자신에게 달려있다. 그런데 때를 만나느냐 못만나느냐 하는 것은 시운이며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운명이다.” 이것이 유가학파의 시조 공자의 천명관인 것이다. 


이런 생각은 후에 맹자에 이르러 이렇게 발전한다. 맹자 왈 “아무도 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은 하늘의 뜻이고, 누구도 부르지 않아도 이르는 것이 운명이다. 오래 살든 일찍 죽든 나는 상관하지 않으며 다만 몸과 마음을 닦아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安身立命(안신입명)하는 길이다” 라고 하였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떠도는 나그네처럼 정신적 자유를 누린 열자(列子)는 역명(力命)에서 운세와 운명의 대화 형태를 빌어 다음과 같이 설(設)한다. “천하의 모든 사물은 자기에 비추어 변화해간다. 장수하는 사람의 오래 삶, 요절하는 사람의 일찍 죽음,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어려움, 일이 잘 풀리는 사람의 잘 됨, 부귀한 사람의 부귀, 빈천한 사람의 빈천 등등을 내가 어찌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이렇듯 전국시대의 제자 백가 중에는 운명을 믿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유가의 세력이 제일 컸다. 한대(漢代) 에 이르러 유가설이 천하에 성행하자 유가의 천명사상이 더욱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새겨졌다. 


때와 관련하여 한 사연을 보자. 필자의 지인인 R변호사는 필자와 교분이 깊은 사람이다. 이이 또한 명리학을 깊이 공부하여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이여서 검사시절 청내에서 ‘R도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R변호사가 역학(易學)에 관심을 가진 것은 고인이신 박재완 선생님과의 인연에서 기인한다. R변호사가 고시생시절 우연히 선생님을 뵙게 된다. 당시 R은 십년 넘게 고시 낭인이 되어 전국 산사를 주유하던 때였다. 십년이 넘는 세월 열 번이 넘는 고시실패에 몸과 마음이 다 피폐해졌고, 집안마저 빈한하여 이제는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때였다. 늙으신 부모님께서 리어커 행상으로 겨우겨우 R의 뒷바라지를 했었는데 이제는 늙으셔서 아픈 허리 때문에 더 이상 육체적 노동을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다. 


R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된 시절이었다. R은 자살을 생각했으나 평생 자신만 바라보고 뒷바라지해온 부모님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고, 이제 와서 고시를 그만두고 취직을 하려해도 취업연령이 넘어서서 그럴 수도 없었다. 천지사방이 꽉 막힌 사면초가였던 것이다. 이때 우연히 만나게 된 명리학의 대가 박재완 선생님은 R을 위로하며 “어차피 10년 넘게 참아온 것 2년만 더 참아봐! 올해는 힘들겠고 내년에는 꼭 합격할 테니 두고 보게!” 라고 하셨다한다. 이에 용기를 얻어 R은 인내 끝에 드디어 사법고시에 합격을 하게 된다. 박 선생님이 그냥 용기를 주려고 한 말씀이 아닌 것이, 말씀하신 합격점수까지 거의 근사치에 이르자 이를 무척이나 신기하게 여긴 R은 연수원시절 틈틈이 명리학을 공부했다. (이때만 해도 사시합격자가 40-80명에 블과했던 시절이여서 합격생간에 경쟁이 심하지 않아 이후처럼 합격자가 수백명씩 나와 연수원 공부가 고시시절 보다 더 빡세다는 때가 아니어서 연수생들은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좋은 두뇌로 흥미 있는 분야를 공부하니 공부의 진척이 빨랐고, 몇 년 뒤에는 웬만한 철학관하는 선생들보다도 더 깊은 공부가 이루어진다. 검사생활을 몇 년 하다 변호사를 개업한 R변호사는 검사시절 배우자로 꽤나 알려진 모기업의 딸과 결혼하여 형편이 확 풀렸고, 변호사 개업 후에도 처가가 소개해주는 기업들의 변호를 주 업무로 하여 큰 부를 이루게 된다. R변호사가 그때 박 선생님을 뵙지 못하였다면 R은 어찌되었을 까? 운명이 무서워진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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