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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만주의 농업 재벌 황룡세

2020.10.21




            만주의 농업 재벌 황룡세 


 사람의 운명은 어떤 자그마한 일을 계기로 크게 성공하기도 하고 반대로 실패하기도 한다. 사람의 운명이란 사람 대(對) 사람의 인연의 끈에 의해 좌우되는 일이 종종 있다. 일제시대 때 만주 땅 심양일대에 어머 어마한 큰 땅을 개발하여 벼농사의 대부로 이름을 떨친 황룡세와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인연이 이런 면의 실예가 될 것이다. 심양일대 벼농사 개발에 크게 성공한 황룡세(黃龍世1990~1943)는 평안북도 벽동군 초산에서 태어나 한일 합방 이듬해 부친을 따라 요령성 홍경현 홍묘자로 이주했다가 1921년 큰 늪지가 있고 습지가 많은 영수대(지금의 심양 인근)로 이사를 했다. 영수대에는 갈밭과 황무지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지만 주위의 흔한 늪의 물을 쓸 수가 없어 버려져 있는 땅 이였다. 수로를 만들어 농경지를 만들려면 수 십리 되는 봇도랑을 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엄청난 자금이 필요했다. 


매사에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인 황룡세는 「수전(水田) 개발에 관한 청구서」를 작성하여 장쭤린 군벌 정부의 수리국(水利局)에 보냈다. 수리국장인 수상호는 자금도 자금이지만 성공여부를 믿을 수가 없어 그 제안을 무시해버렸다. 황룡세가 수십 차례나 수리국장을 찾아갔으나 타국에서 흘러 들어와 땅이나 파먹는 천한 외국인 농사꾼인 황룡세를 무시하고 만나주지 않았다. 황룡세는 이에 굴하지 않았고 수상호의 집을 수소문해서 그가 아침에 화려한 마차를 타고 출근길에 올랐을 때 길 한복판에 대자(大字)로 누워 “수리국장을 만나기 전에는 길을 내줄 수 없소!”라고 하며 뻐댔다. 이렇게 되자 수리국장도 어쩔 수없이 황룡세를 사무실에서 만나 주기로 약속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체되면 윗분들을 모시고 해야 하는 회의에 늦을 수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 또한 황룡세의 운 이였다. 


세세하고 치밀한 계획과 수전개발에 대한 황룡세의 탁월한 지식과 열변에 생각이 돌아선 수리국장 수상호는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지장을 찍었다. 이 계획이 황룡세의 장담대로 성공만 한다면 수상호는 그 공을 인정받아 크게 출세할 수 있었기 때문 이였다. 자금은 수리국에서 대고 공사는 황룡세가 책임지고 완수 하겠다는 것과 만약 공사가 실패하면 죽음을 달게 받겠다는 생사(生死)를 건 계약이자 황룡세에게는 도박인 계약 이였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자 중국 한족 지주들이 조직적으로 공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공사가 성공하여 큰 농경지가 개발되면 지금처럼 자신들의 땅을 무기로 횡포를 부릴 수가 없기 때문 이였다. 황룡세는 수리국장에게 이 문제를 해결해 주도록 민원을 넣었고 수상호는 군사를 파견하여 공사를 방해하는 자들을 체포하자 더 이상 감히 방해하지 못했다. 


공사가 난관 끝에 성공하자 깊이 2미터 너비 10미터 봇도랑으로 물이 흘러 넘쳤다. 영수대 일대 황무지 1,000여 무(畝)가 (무는 논밭 넓이의 만주지역 단위로서 15무가 1헥타르에 해당된다.) 논이 되었고 1923년 방사둔에서만도 164무의 논이 개발 되었다. 엄청난 농경지가 생긴 것이다. 이때 정국은 중화제국 총통인 위안스키(원세개)가 죽자 각 지역의 군벌들이 각자의 군사력으로 사실상 그 지역의 왕이 되었다. 군벌들은 제국주의 열강들을 등에 업고서 각지에서 독립된 왕국행세를 하며 서로 간에 전쟁도 불사했다. 마적 출신인 만주지역의 실질적 지배자인 장쭤린이 다른 군벌과 전쟁을 버릴 때 황룡세는 조선 사람들이 만주에서 살려면 장쭤린의 환심을 사야한다는 생각에 영수대조선인의 이름으로 벼 500가마니를 군량으로 보낸다. 


한족 지주들 자본가들이 눈치만 보며 군벌 간의 싸움을 강 건너 불 구경하 듯 할 때 이런 뜻밖의 지원을 받게 되자 장쭤린은 매우 기뻐했고 측근에게 “조선 사람들의 대표를 한번 만나봐야겠다!”고 했다. 훤칠한 체구에 회색 조선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쓴 황룡세를 접견한 장쭤린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어디에서가 본 듯한 인상의 황룡세가 성은 황씨이고 전에 영수대로 이전하기 전에 홍경현 산골에 살았었다는 말을 하자 뛸 듯이 기뻐하며 황룡세를 끌어안았다. 사연은 이렇다. 투전꾼이자 마적출신인 장쭤린이 한번은 다른 마적 패에 쫓겨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홍경현 산골로 도피하였고 밭에서 일하고 있던 황룡세 부자에게 숨겨 달라 하며 목숨을 구걸하였다. 이에 황씨 부자는 곤궁에 처한 사람을 못 본 척 할 수 없어 급하게 숨겨 주었고 금방 뒤이어 쫒아온 마적 때 무리에게 “수상한 사람이 저 북쪽 방향으로 냅다 뛰어 도망갔습니다.”라고 거짓 정보를 주어 구해준 이가 있었는데 이이가 장쭤린 이였던 것이다. 


황씨 부자는 이후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얼마 뒤 영수대로 이사를 했다. 장쭤린은 이후 세력을 잡자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하기 위해 애써 알아 보았지만 이들 부자를 찾지 못해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생명의 은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장쭤린은 “사람이 덕을 입었으면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 하는 법! 소원이 무엇인가?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네!”라고 했다. 장쭤린의 말에 황룡세는 “당신과 의형제를 맺는 게 소원입니다.”라고 당돌하게 말하자 장쭤린은 껄껄 웃은 뒤 “자네와 나는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나니 내가 아버지뻘인데 어떻게 의형제가 될 수 있겠는가? 자네 부친께서 벌써 세상을 떠났다니 나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 의형제를 맺고 나를 아버지로 여기는 게 좋을 것 같네!”라고 했다.


장쭤린은 성대한 연회를 열어 자신의 아들 장쉐량과 황룡세의 결의형제 의식을 거행했다. 이는 당시 그곳신문 「성경일보」에 크게 게제 된 바 있다. 이렇게 해서 천군만마를 얻은 황룡세의 세력은 막강해졌다. 어마 어마한 규모의 농업을 하며 권력까지 얻은 그는 거칠 것이 없었다. 만주의 고관들이나 재벌들도 어려운 일만 있으면 황룡세에게 청을 넣을 정도였다. 황룡세는 영수대 마을 복판에 높은 담을 쌓고 20여 칸이나 되는 네모형의 벽돌기와집(중국 전통가옥 형태로 사각으로 담을 쌓고 가운데에는 정원이 있고 사면의 건물이 정원을 바로 보는 형식)을 짓고 살면서 고급 쌍두마차를 타고 출입을 했다한다. 이후 황씨네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몰락했지만 만주지역 영수대 마을에는 지금도 그 집의 흔적이 남아있고 그 자손들이 이른바 ‘조선족’으로 그 일대에 살고 있다 한다. 


이렇듯 사람과 사람과의 작은 인연이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이래서 나온 말이 ‘사람팔자 시간문제다.’라는 소리인 것 같다. 또한 모든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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