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부모 복 박복한 박 군!
40代 초반의 나이에 벌써 큰 부(富)를 이룬 박 군을 필자가 처음 만난 것은 12~3 년 전이다.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박 군의 사주를 보고 필자가 건넨 첫마디는 “자수성가해야 할 팔자입니다. 사주구성으로 보아 할아버지는 큰 거부이셨겠지만 아버지 대에서 영락하여 아마도 본인은 큰 어려움 속에서 자랐겠지만 앞으로 10년 쯤 흐르면 큰 성공을 이룰 것이고 이후 할아버지 대의 가문의 부흥을 되찾을 거라 보여 하는 말입니다.” 였다. 필자의 진단에 크게 고무된 듯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굳게 다물던 귀여운 청년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박 군은 1977년 양력 11월 27일 정오경 태어난 사주명식을 지녔다. 음력으로 10月 17日生이며 午時에 해당하니 사주팔자는 丁巳年 辛亥月 戊子日 戊午時이고 운의 흐름은 庚戌·己酉·戌申·丁未·丙午·乙巳로 흐르며 대운수는 7이다. 亥月에 태어난 戊土일주가 일지 子水가 시지 午火를 충(沖)하고 월령 亥水가 년지 巳火를 沖하여 신약 사주이다. 따라서 월지 辛金과 亥水는 기신에 해당된다. 년주는 조부모를 뜻하고 월주는 부모를 나타내는데 이 사주팔자를 보면 년주에 희신인 인수가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박 군의 조부모는 대부호였으나 그의 부친이 모두 탕진하게 됨을 나타낸다. 운의 흐름을 살펴보니 초년운이 박 군에게 불리한 서방(西方) 金 대운으로 흐르고 있어 이때 부모덕 없이 초년고생이 심하였겠으나 중년 丁亥 대운을 만나면서 크게 재복이 터져 성공할 수 있겠고 이후 거부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 예측되기에 이리 말해준 것일 뿐이다. 격려차원인 립써비스를 한 것이 아닌 것이다.
이글을 쓰는 戊戌年(2018年) 현재 박 군은 정보통신사업으로 큰 부를 이루었고 앞으로도 사업은 일취월장하여 큰 거부가 될 것이 틀림없다. 박 군의 할아버지는 건축업으로 크게 성공하신 분이였다. 박 군 할아버지도 부모덕 없이 초년고생이 심했다한다. 집안이 빈한하여 배우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으니 변변한 직업도 찾을 수 없어 공사장잡부(노가다)로 고생 고생하다가 어렵게 모은 작은 돈으로 친구와 함께 허술한 집을 사서 고쳐 팔면서 운 때가 맞아 떨어졌다. 여기서 번 돈에다 이곳저곳에서 끌어들인 빚으로 조그만 연립주택을 지어 분양한 것이 건설업의 시작 이였다. 집장사로 단단한 재미를 본 박 군 할아버지는 작은 건설 회사를 차리고 본격적인 건설사업에 뛰어들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
박 군의 아버지는 이처럼 근검절약하며 일 밖에 모르는 부친과는 영~ 딴판 이였다. 어려서부터 공부에는 담 쌓고 지내며 못된 친구들하고 어울려 못된 짓하고 다니는 게 일이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당연히 실력 때문에 대학진학은 꿈도 못 꾸었는데 못 배운 한을 자식에게까지 물려 줄 수 없다는 아버지의 집념으로 큰 기부금을 내고 뒷구멍으로 어찌어찌하여 대학에 들어는 갔다. 대학가서도 역시나 공부는 뒷전이고 여학생들 꽁무니 쫒아 다니며 돈 쓰기에 바빴다. 이때는 학사관리가 지금처럼 엄격하던 때가 아니 여서 아무튼 대학은 졸업하게 되었고 이때는 또 지금과 달리 취업난이라는 게 없던 시절이여서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학교성적에 크게 관련 없이 취업이 손쉬운 시대여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업이 되었다. 이 역시 아버지의 재력과 인맥이 동원된 결과였다.
몇 년 건성으로 불성실한 직장생활을 마지못해 하던 중 드디어 일이 터졌다.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져 심한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것이다. 아버지의 불행은 망나니 아들의 행복시작(?)이였다. 직장을 즉시 때려치우고 아버지의 가업을 잊는다는 거창한 캐치프레이를 들고 본격적으로 사업이 아닌 주색잡기에 나서게 된다. 말릴 사람이 없으니 제 세상을 만난 것이다. 아버지가 그토록 애쓰고 이뤄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불과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런 사업 저런 사업 마구잡이식으로 벌려 놓고 양아치 친구들 불러다 임원자리에 앉혀 놓고 관리하라 시키고는 기집질에 해외여행에 마약파티까지 온갖 잡놈의 짓은 다했다. 결국 사업은 당연히 쫄딱 망했고 직원의 투서로 마약사범으로 감방생활까지 거치며 몰락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박 군의 앞날은 뻔한 것 이였다. 친엄마는 아버지의 바람기에 질려 어린 박 군을 버리고 일찍이 도망을 갔고 새로 들어오는 새엄마들은 (박 군이 기억하기에 네다섯 명쯤으로 숫자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같이 모두가 박 군을 모지게 구박하고 때리기까지 했다한다. 아버지가 돈이 남아있을 때는 끊임없이 새엄마들이 집에 들락거렸지만 쫄딱 망한 뒤에는 새엄마들의 행진도 끝이었다. 이런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다행히 박 군은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공부한 덕에 성적은 항상 우수했고 장학금을 받고 서울 모 사립대에 입학한다. 재학 중 군대를 다녀왔고 졸업과 동시에 모 장학재단 추천으로 미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
미국에 유학 와서 생활비를 벌기위해 코피를 쏟아가며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해나갔고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졸업 후 미국기업에 취직이 되어 미국에 눌러 살게 되었고 이후 자기사업을 차려 독립했다. 이리하여 필자를 만나게 된 인연이 있었다. 한국에 있는 아버지는 죽지도 않고 거의 폐인이 되어 주변사람들의 민폐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인간성이나 행태를 너무도 잘 아는 박 군은 아버지에게 조금씩 생활비나 보내주었지 결코 미국에 불러들이지 않았다. 필자 역시 이 문제로 고민하는 박 군에게 절대 아버지를 부르지 말 것을 당부했다.
어찌 알았는지 어려서 박 군 팽개치고 도망간 어머니도 박 군에게 연락을 해왔다. 자신을 미국에 데려가서 함께 살자는 애절한 사연 이였다. 이 문제로 또 다시 고민하는 박 군에게 어머니 역시 옆에 있으면 박 군에게 큰 해(害)가 될 것이니 부르지 말 것을 당부했었다. 부모자식간의 연을 끊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들 서로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에 그랬다. 어머니에게도 다소간의 생활비만 보내는 선에서 관계를 유지하라했다.
박 군은 이후 아버지와 어머니의 원망과 협박에 계속 시달렸다. 아버지 왈 “이 개놈의 시끼야! 돈을 보내려면 먹고 살 정도는 보내줘야지 이게 뭐냐? 내가 거지냐? 이놈의 시끼야!” 엄마 왈 “이놈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를 부르지도 않고 팽개쳐 두냐 이 불효막심(?)한 놈아!” 쯧쯧쯧!!! 이렇게 사는 것도 다 박 군의 팔자이니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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