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사랑한 토정 이지함

2020.10.24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사랑한 토정 이지함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土亭) 이지함(1517-1578)은 고려의 대문호인 이색의 후손이다. 부친인 이치는 판관 이였고 형인 이지번은 인종 때 백의재상(白衣辛相)이라 불리었던 사람이고 조카인 이산해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던 명문가이다. 처음 이지함은 형 이지번에게 글공부를 배웠는데 지함의 머리가 너무 비상하고 어려서부터 역학에 능해 앞날을 보는 능력이 뛰어나 더 이상 가르치기가 어렵자 당시 재야성리학 거목인 화담 서경덕에게 지함의 교육을 부탁했다. 이지함은 학문적 성취가 높은데도 벼슬을 욕심내지 않았고 물욕도 없었다. 그래서 늘 무명옷에 짚신차림으로 다녔으며 세도를 누리는 벼슬아치들을 풍자하고 비웃었다. 거처도 한강기슭 동막 근처에 흙집을 짓고 홀로 살았다. 지금의 마포구 토정동이 바로 이곳인데 그는 이 흙집을 토정이라 이름 붙이고 살아 그의 별호가 토정이 되었다. 


굵은 베옷과 헌짚신, 다 부서진 갓을 쓴 채 거지꼴로 고대광실 사대부 집에 거침없이 들어가서 비단옷 입은 정승판서들과 어울려 놀면서 그들을 마음껏 조롱했는데 토정의 고매한 인품과 학식 때문에 그들이 토정을 홀대하지 못했다. 이런 생활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팔도산천에 그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드물 정도로 이곳저곳을 유랑했다. 갓도 쓰기 귀찮아지자 쇠로 만든 쇠 벙거지를 쓰고 과객질을 하고 다니다가 이따금 쌀이 생기면 길가에서 쇠 갓을 벗어 솥으로 사용하여 밥을 지어먹었고 식사가 끝나면 씻어서 벙거지로 쓰고 방랑을 계속했다. 명문거족이 토정이 스스로 천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밑바닥 생활까지 서슴치 않았던 것은 희망이 없는 빈민들에게 새 희망과 꿈을 주는 비결서인⌜토정비결⌟을 준비하기위한 기초 경험을 하기 위해서였다. 


토정이 초림동 이였을 때 마포인근에 사는 왕족 모산수 이성랑이 토정의 인물됨을 눈여겨보다 사위를 삼았다. 혼례식을 올린 이튿날은 몹시 춥고 눈이 내리는 날씨였는데 토정이 처가를 나가 슬그머니 없어졌다. 새신랑이 말도 없이 사라지자 처갓집은 신랑이 없어졌다고 날리가 났다. 그런데 그가 슬그머니 처가로 들어서는데 새신랑 이라고 새 옷을 비단으로 지어 입혔는데 맨 속옷차림으로 추위에 벌벌 떨며 들어선다. 아침에 입고나간 명주도포는 어디다 벗어버리고 맨 속옷 바람이냐고 물으니 “갑자기 볼일이 생겨 홍제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 이였는데 다리목에서 거지아이 셋이 추위에 벌벌 떨고 있지 뭡니까? 아이들이 그렇게 떨고 있는데 나만 혼자 명주옷을 입고 있기가 민망해서 세 조각으로 찢어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라고 태연히 대답했다한다. 이렇듯 인정이 많았던 토정 이지함은 벼슬에 뜻이 없었으나 말년에 친구들에 강권에 못 이겨 포천 현감으로 처음 벼슬길에 나선다. 


벼슬길에 나섰지만 그는 여전히 다갈색 무명베옷에다가 짚신을 신고 있었다. 부임 첫날 아전들이 그 고을에서 나는 특산물로 차린 도임상(부임을 축하하며 내놓는 밥상)이 올려졌다. 진수성찬 이였다. 토정은 상을 보더니 “먹을 것이 없다!”라고 했다. 아전들은 토정이 명성과는 달리 음식투정이 심한 까다로운 노인이라고 비웃으며 더욱더 정성을 다해 더 푸짐한 성찬을 차려 대령했다. 토정은 여전히 “먹을 것이 없다!”라며 상을 물렸다. 아전들은 당황하여 “저희 고을은 서울과 달라서 더 이상 좋은 밥상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토정은 이렇게 답했다. “아니? 그래 이 고을에는 잡곡밥도 없느냐? 나는 원래 좋은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어 상을 물렸을 뿐이다.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고 고달픈 까닭은 관리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오곡밥 한 그릇과 나물이나 시래기국 한 그릇만 올려라!” 


이튿날 포천 고을 내에 방구께나 뀐다는 양반과 부자 등등이 현감께 인사를 한다며 찾아왔다. 신임 사또가 왔으니 제대로 된 상을 봐 올릴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데 말린 나물죽 한 그릇씩이 나왔다. 모인 손님들은 기가 막혀 불평도 못하고 서로 눈짓만 교환하고 있는데 신임사또가 먼저 숟가락을 들고 보란 듯이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오늘은 참 배불리 맛있게 먹었다!”라고 했다. 토정 이지함이 오래지 않아 벼슬자리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벼슬을 내던지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니 군내사람들이 떠나는 길을 가로막고 사또의 옷자락을 붙잡고 유임할 것을 눈물로 호소할 정도였다. 토정이 포천 현감을 때려 친 이유는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개간사업을 하여 농토를 늘리는 방안을 상소하였으나 기각되어 버리자 성질이 나서 때려 친 것이다. 


토정이 포천 현감 재직 시 임진강의 범람을 예견하여 많은 생명을 구한 일은 유명한 일화로 남았다. 1578년 토정은 아산현감으로 다시 등용되는데 부임하는 즉시 걸인청을 만들어 관내의 걸인들을 구제하고 노약자와 굶주린 백성들을 구호하였다. 또 관내를 자주 시찰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두루 살피고 백성들이 무고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급 관리들을 엄하게 다스렸다. 또 관내 백성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생계를 이어가도록 도와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당시 아산에는 조정에 상납하는 잉어를 기르는 양식장이 있었다. 그런데 조정에 바치는 과정에서 때어먹는 관리들이 많아 바쳐야할 잉어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이에 토정은 바치는 잉어의 수를 줄여달라는 소극적인 청원을 하지 않고 직접 양식장 자체를 아예 메워서 폐쇄 시켜 버렸다. 무서운 결단과 과감성 이였다.


그리고 직접 조정에 장계를 올려 아산에는 이제 양어장이 없어 더 이상 잉어를 바칠 수 없다고 보고해버렸다. 중간 관리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문제 될 경우 여기저기 떼어먹은 관리들이 줄줄이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 이였다. 다행히도 이 문제는 커지지 않고 일단락되었다. 토정의 애민정신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아산현감 재직 시 흉물스러운 아전이 있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데 열성 이였다. 토정이 엄히 질책해도 그곳 대대로 토박이인 이놈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그 짓을 계속했다. 토정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에게 벌을 주었다. “너는 비록 나이는 많으나 생각하는 것은 어린애 같으니 어린애 대접을 해주겠다.” 토정은 늙은 아전의 갓을 벗겨 흰머리를 총각머리처럼 땋아 내리게 하고 벼루를 들게 한 채 종일 책상 옆에 세워 놓았다. 그러나 늙은 아전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지 못하고 너무 수치스러워 복수를 노렸다. 


토정은 지네 생즙을 먹는 괴상한 버릇이 있었다. 하루 한 그릇씩 지네 즙을 마시곤 해독을 위해 날밤(生栗-생률)을 먹었다. 어느 날 지네 즙을 마시고 날밤을 깨물었는데 날밤이 아닌 버드나무 조각 이였다. 앙심을 품은 아전 놈이 버드나무를 날밤처럼 깎아 토정을 속인 것이다. 토정은 온몸에 지네 독이 퍼져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62세 때였다. 허망한 죽음 이였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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