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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두루뭉술한 진단?

2020.10.26




            두루뭉술한 진단?   


 중국 사상계에서 운명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 발전하여 개인의 자아에 대한 철저한 각성이 일어난 이후다. 중국의 불교는 처음 왕조 중심으로 자리 잡았는데 수나라 이전에는 초기 단계였다. 서기 589년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불교는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룬다. 당나라 때 오늘의 감사원장 쯤 되는 직위인 <전중시어사>라는 고위 관직까지 오른 이허중(762~813)이 사람의 운명은 생년월일시에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생년월일시를 四柱(사주)라 이름 지었다. 깊은 연구로 추명학이라는 새로운 운명학사상을 개창했다. 동양 역사상 최초의 운명학 이었는바 그의 저술로 이허중명서(李虛中命書)가 전한다. 이허중 이후 천재적 두뇌를 지닌 많은 탐구자들이 이 논리를 발전시켜 왔는바 송대에 서자평, 명나라 만민영 등이 비약적으로 이 이론을 체계적이고 정교하게 다듬었고 정나라 건륭 4년(1739)에 조정에서 오행추명학술을 총 정리하여 오행학술의 백과사전격인 <협기변방서> 36권을 집대성하여 편찬한다. 


이러한 발전 과정을 통하여 천수백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양 3국(중국·한국·일본) 사람들의 마음속에 운명이 팔자에 따른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주게 된다. 헌데 이허중의 추명학은 완전무결하게 논박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무결하게 진리로 입증되지도 못해 의사과학(pseudo-science)으로 불리게 된다. 이 말은 ‘이현령 비현령’식으로 가져다 붙이면 얼추 들어맞기도 하고(전혀 틀리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결코 틀리지 않는 절대적 이론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명학을 통계학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운명학은 진리로 입증된 절대적 지식체계는 절대 아니요 그렇다고 그 과학적 탐구방법과 오행이론에 입각한 인과론적 논리체계를 무턱대고 일축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예전에 필자를 자주 찾던 오 여사님이 생각난다. 이분은 필자에게 오실 때마다 컴플레인을 해대셨다. “선생님이 이야기한 게 맞지 않았어요!” 이런 불평도 한 두 번이지 오실 때마다 이러니 필자도 은근히 짜증이 났다. 그래서 필자 왈 “맞지도 않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나를 찾으세요? 돈이 썩어나나요?”라고 하니 “그래도 맞는 게 더 많으니깐 오는 거지요 뭐!”라고 하시며 입을 삐쭉이신다. “제가 진단한 것 중에서 몇 개나 맞고 몇 개나 틀리나요?” 진짜 궁금해서 물으니 “10개 중 7~8개 이상은 맞는 거 같은데 1~2개 이상은 꼭 틀리니 제가 불평을 하는 거지요!”라고 하신다. 필자도 사람이다. 신이 아닌 것이다. 이 정도의 정확도면 유명 역술인 누구에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적중률이다. 명리학은 통계학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 못하니 이런 불만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건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주역의 쾌상은 매우 포괄적이며 상징적이다. 이 쾌를 자신의 현실에 맞추어 비교 해석해 내는 것이 역학인 것이다. 이래서 종종 “기가 막히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필자의 진단 이 매우 두루뭉술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필자의 주 진단법인 명리학과 주역이 이렇듯 두루뭉술한 학문인 것을 어쩌랴? 우리나라의 사상계에서 음양오행의 본격적인 탐구는 조선중기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로 알려진 화담 서경덕(1489~1546) 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 화담선생은 사서삼경 중 <대학> 궁리와 격물치지에 근간을 두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중용>과 <주역>의 궁리진성 순성명지리로 이어진다. 화담선생은 일생을 세상에 나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으로 보내신 대 철학자이시다. 화담선생의 제자로는 허엽 박순, 민순 박지화, 서기 한백겸, 토정 이지함 등이 있었고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중에 가장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져 있고 신비한 인물이 토정 이지함이다. 서화담의 상수학을 발전시켰던 중요인물이기 때문이다. 음양오행의 이론과 추명학은 조선에서도 깊은 연구가 있었다. 실학자들이 그 중심에 서있었다 할 수 있는데 반계 유형원(1622~1673)은 성리학에 바탕 하여 문학, 역사, 지리 병법, 역학을 깊이 연구했다. 그의 사상은 이익선생(1681~1763), 홍대용(1731~1783), 정약용(1762~1836)으로 이어지게 된다. 정약용은 유형원과 이익의 실학을 계승하여 중농주의를 주창했고 북학파의 주창자 박지원(1737~1805)의 사상에 공감하여 기술도입과 개발을 주장했다.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주역심전>과 <역학제언>을 썼다. 이와 같이 조선의 일부 유학자들이 명리학과 주역을 연구했던 이유는 명리학의 개창자 이허중이 유학자였고 그 중흥조 만민영 역시 상서벼슬을 지낸 유학자였던 것과 무관치 않다. 


일부 유학자들은 오행 추명학을 인격수양의 한 가지 방법론으로 인정했고 내적수양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지 오로지 점을 치는 목적으로 보았던 것이 결코 아니였다. 이렇듯 역술을 자기수양의 한 방편으로 대하며 공부해야지 점술적 측면만을 강조하여 이를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본다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생기게 된다. 한마디로 인간이 추접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일부 역술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알려지면 이를 기회로 여색에 빠지기도 한다. 상담을 하다보면 유능한 역술선생에 대해 깊은 신뢰가 생길 수 있고 이런 상대의 신뢰와 존경을 이용하여 고객인 여성을 유혹하여 농락하는 파렴치한 들이 있다. 손금 봐준다며 여성고객의 손을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기도 하고 밖에서 만나자고 유혹하기도 한다. 


필자가 상담을 하다보면 어떤 여성고객 분들은 손을 내밀고 손금을 봐달라고도 하는데 필자는 평생 결코 손금을 봐주는 일은 없다. “저는 손금 안봅니다!”라는 말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예외는 없다. 또한 필자는 고객과 외부에서 절대 만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고 이를 지켜 왔다. 어떤 분들은 필자가 너무 폐쇄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나 필자가 건방져서가 아니라 ‘도사는 은둔해야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또 어떤 역술인들은 고객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투자를 권유하거나 돈을 빌리기도 하는데 이런 역술인은 무조건 사기꾼으로 보면 틀림없다. 역술인이 유능하면 밥 먹고 사는 것은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로 돈을 벌수 있는데 고객과 금전적인 관계가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필자는 고객과 사적 교류나 금전관계는 전혀 맺지 않는다. 왜냐고? 그게 정도이기 때문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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