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깡패에서 유흥업계 대부로 성공한 남자

2020.10.27



                 깡패에서 유흥업계 대부로 성공한 남자 


 이사장님은 유흥업으로 큰 부를 이룬 분이다. 이사장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장애인이었다. 아버지는 다리 한쪽을 소아마비로 심하게 절었고 어머니는 지능이 좀 떨어지는 분이셨다. 중매로 비슷한 불우한 처지의 사람끼리 만나 부부가 되었다. 두 분은 함께 리어카를 끌고 빈병이나 박스, 종이 등을 주어서 그날그날 겨우 연명하는 처지였다. 이사이에 이사장님이 태어났다. 이사장님이 7살이 되었을 때 새벽부터 서둘러 좋은 폐지가 나는 곳을 찾았던 부모님은 달리던 트럭에 치여 그만 두 분 다 숨지고 말았다. 졸지에 고아가 된 이사장님은 홀로 생활하던 외할머니의 차지가 되었다. 외할머니 역시 돌보는 자식도 없이 늙고 병들어 죽지 못해 사는 처지였다. 이사장님은 천덕꾸러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12살 무렵 외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그야말로 천애고아가 되어 보호시설에서 자라게 된다.  


이렇게 제대로 못 먹고 자라면서도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한 뼘은 컸고 기골이 컸다. 18세경에는 키가 185cm에 몸무게가 80kg을 넘기는 그야말로 기골이장대한 사나이가 되어있었다.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던 아버지가 기골이 장대 했는데 아버지를 닮아서인 듯 했다. 공부에는 원체 취미가 없어 극장가를 배회하며 깡패들과 어울렸다. 원체 힘이 쌔고 몸이 날쌔며 주먹이 쌔서 불량배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극장인근에서 작은 깡패집단의 우두머리로 생활하던 중 어른 깡패조직에 발탁되어 생애 처음으로 취직(?)을 하게 된다. 인근 나이트클럽의 기도로 발탁 된 것이다. 유흥업소에는 이런저런 싸움이 많고 주변의 불량배들이 시비를 걸어오는 일도 많다. 손님끼리 싸움이 나면 이를 제압해 업소 밖으로 내 쫒아야하고 인근 불량배들이 슈킹(돈 뜯으러 와서 행패 부리는 것)하러 오면 이를 힘으로 제압해야하기에 유흥업소에는 이런 기도들이 몇 명 항시 대기해야 했다. 


군대는 학력 미달에 고아였기에 자연스레 면제가 되었다. 어느 정도 머리가 크자 한 유흥업소의 영업부장이 되었다. 당시 일정규모 이상의 유흥업소에는 업주와 계약을 맺고 그곳을 나와바리(구역)로 하는 조직폭력단에서 자신의 조직원을 그곳 업소의 영업부장으로 취직시키고 조직원 몇 명을 배치해 업소를 관리(?)하는 게 보통이였다. 이사장님은 이제 완연한 조폭조직원이 된 것이다. 이러다보니 이런저런 사건에 연류 되어 교도소도 몇 번 다녀온다. 이런 거친 생활을 하던 중 29세 무렵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다. 살다보면 사람에게 인생의 물줄기를 확 바꾸어 놓는 어떤 기회가 오기도 하는데 이때가 이사장님의 인생 터닝 포인트였다. 영업전무(경력이 쌓이니깐 호칭도 따라서 매우 급속도로 올라갔다)로 일하고 있던 업소의 사장이 도박에 빠져 사채 빚을 엄청 지고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야반도주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 업소 사장에게 많은 돈을 빌려 주었던 HOTEL사장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업소를 인수하게 되었는데 이런 고급 룸싸롱을 운영해 본 경험이 전혀 없어 평소 좋게 보았던 이사장님에게 운영을 맡기게 되었다. 귀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 사업을 하게 된 이사장의 진가가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선 사업장 내부 인테리어 공사부터 시작 했다. 고급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특실에는 천장과 바닥에 화려한 색의 물고기들이 노는 모습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어항을 설치한 초호화 룸을 조성했다. 꼭 용궁에 와서 술을 마시는듯한 컨셉을 따온 것이다. 당시에는 최초로 시도되는 인테리어 기법 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종업원들의 경우 팁으로 생활하는 게 상식이고 기본 급여는 없었는데 과감히 웬만한 직장인 급여에 해당하는 기본급을 주고 팁을 받으면 새끼마담이나 마담에게 일정액을 바쳐야하는 제도를 과감히 폐지하고 팁을 완전히 아가씨 수입이 되도록 조치했다. 대신 새끼마담이나 마담이 유치한 손님들 매상의 30%를 과감히 지불하게 했다. 


이렇게 대우를 확 높이자 이 세계에서 내놓으라하는 유명마담, 새끼마담들이 이곳에서 일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아가씨들의 경우에도 대학생이나 대학 졸업자 이상으로 학력제한을 했으며 외모도 탤런트급 이상의 아가씨들만 선발했다. 손님들과의 어느 정도의 지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교양과 특급의 외모를 가진 아가씨들만 선발한 것이다. 처음 “무슨 술집 나가요에게 학력이 필요해? 정말 꼴값들을 하네!”하며 비웃는 사람이 대다수였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아가씨들 수입이 엄청나다고 소문이 나자 못 들어와서 난리였다. 이른바 ‘10% 술집’의 원조였던 거였다. 여기다 영어ㆍ일어 특기자인 웨이터나 아가씨들에게 특별 수당을 주고 회화학원을 등록하는 직원에게는 학원비 까지 지급했다. 공부하기 싫어 술집으로 빠진 아가씨가 적지 않은 이 세계에서는 파격 이였다. 술값도 엄청 비싸게 책정하고 발렌타인30년산이 주요 주종이 되는 영업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비싼 술값에도 불구하고 손님들이 몰렸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는 방을 얻기 힘들 정도였다. 


‘특급 미모의 여대생들이 써빙하는 집’ ‘대졸이상의 교양과 특급 미모를 갖춘 여종업원이 접대하는 집’으로 소문을 냈고 그렇게 특별한 술집으로 소문이 났다. 외국손님을 모시고 가도 언어소통에 지장이 없는 술집은 당시로서는 국내 최초였다. 정재계 인사들과 졸부들이 주 고객층 이였다. 하기야 엄청난 술값에 일반인들은 구경할 엄두도 못 냈다. 결과는 대박 이였다. 영업사장이라 일정 지분을 받는 입장 이였는데 이렇게 되자 주도권은 이사장에게 넘어와 투자된 동업자(호텔사장)의 지분을 다 계산해주고 독립경영자가 되었다. 여기서 번 돈으로 술집 몇 개를 더 인수해 체인식으로 운영하며 사채업으로 돈을 키웠다. 사채업도 일반 개인을 상대하는 지저분한 사채가 아닌 중소기업 체를 대상으로 하는 차원 높은(?) 사채업으로 돈을 불려 나갔다. 물론 모든 사업에 깡패시절 동생들이 뒷심이 되어준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 이였다. 


처음 필자와 마주했을 때 이사장님은 LA에 이민 온지 3년이 채 안된 새내기였다. 이곳에 와서도 자신의 주 전공을 살려 유흥업에 막 진출한 상태였다. 필자 왈 “인생에도 터닝 포인트가 있는데 20대 후반에 그런 기회가 들어 온 것 같습니다. 조실부모하고 외롭고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내셨을 터인데 그때부터 돈의 물줄기가 터지기 시작하니 이때부터 지금까지 큰돈을 버셨을 겁니다. 다만 그 돈이 주로 ‘검은돈’이였을 거지만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곳에 번 돈을 쓰시면 그 과정도 미화 될 수 있을 겁니다!”라고 하니 건달출신답게 그 큰 쩍 벌어진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내가 이런 곳 여러 곳을 한국에서부터 다녀봤는데 정말 제법(?)이시네요.”라고 하며 건방지게 답한다. 자신의 성공에 어느 정도 도취되어 세상이 돈짝 만해 보이는듯한 태도다. 재벌 그룹 회장도 면담해 보았지만 모두 겸손 하셨다. 이사장님에게는 이런 겸손함이 없어 보여 아쉬웠다. 아무튼 대단한 인생역전이라 하니 할 수 없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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