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기 의 역사
요즈음은 한국에서도 개(보신탕)를 먹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었지만 예전에는 꽤나 많은 이들이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이로 인해 세계 각국의 동물 보호단체들은 한국을 미개국가로 성토하고 예전에 있었던 1988년 서울 세계올림픽대회 마저 보이콧 하자는 운동까지 일어났었다. 한국의 개식용 문화를 비판하는 국가 중 프랑스가 제일 격렬했는데 원숭이 골 요리까지 해 처먹는 놈들이 더 흥분하여 날뛴 게 우습기까지 하다. 필자는 개고기를 전혀 먹지 못한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지인들이 강권하면 마지못해 국물 몇 숟가락 떠 먹어본 것이 전부다. 그 마저도 찜찜했다. 필자가 상담을 하다보면 고객 중에 ‘오랜만에 한국에 나가 개고기를 실컷 먹고 왔다.’는 고객을 보기도 한다. 이곳에 살고 있는 교포들이야 개고기를 먹을 기회도 감히 엄두도 못 내지만 오랜만에 한국에 나가서 옛 추억이 생각나 개고기를 먹고 오는 이들도 간혹 있는 듯했다.
개고기를 먹는 민족 중에는 중국의 한족도 빼 놓을 수 없다. 중국 사전인 <사해(辭海)>에는 “개는 충성스러운 가축이며 아울러 맛 좋은 가축이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리고 개는 사람의 뜻을 용케 알아듣고 주인의 빈천을 가리지 않고 충성하는 의견(義犬)이라는 부언이 달려있다. 하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 이유 없이 개를 경멸하기도 한다. 모진 욕 중에 개를 붙여 하는 것이 많다. ‘개만도 못한 놈’ ‘개새끼’는 아주 극단적인 욕이다. ‘개망신’ ‘개고생’ ‘개지랄’등 개자가 붙으면 극단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하지만 중국에 사는 민족 중 개를 신성하게 여기는 민족이 있으니 바로 만주족이다. 개는 까마귀와 나란히 만주족의 토템이다. 만주족이 개를 토템으로 숭배하게 된 까닭은 우리 민족과도 무관치 않다. 성주 이씨의 시조 이순유의 15대손 이영(李榮)은 명나라 홍무연간(1368~1398)에 조선에서 죄를 짓고 국경을 넘어 오늘날 요령성 철령으로 도망친 후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이영의 5대손인 이성량(1526~1615)은 임진왜란 당시 명군을 지휘했던 이여송의 부친인데 <철령현지>에 기제 된 바에 의하면 이성량은 요동의 최고 군사 지휘자인 요동총병 영원백에 임명되었다. 청나라태조 누루하치(1559~1626)의 조부와 부친은 이성량의 수하장군 이였다. 이성량이 요동총병관에 임명될 당시 누루하치는 열다섯 살 소년 이였다. 누루하치의 조부와 부친은 이성량 밑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다른 사람들의 밀고로 누명을 쓴다. 이성량은 만력 11년(1583년) 그들을 죽여 버렸다. 누루하치는 이성량과 명나라 조정에 대하여 철천지한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를 숨기고 이성량의 경호병으로 계속 근무를 했다. 어느 날 누루하치는 이성량의 발을 따뜻한 물로 씻어주다가 이성량의 발바닥에 세 개의 빨간 점이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총병님 발바닥에 있는 빨간 점이 소인의 발에도 있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성량이 누루하치의 발바닥을 확인해 보니 누루하치의 발바닥에 일곱 개의 붉은 점이 있었다. 이성량은 ‘이는 발로 칠성(七星)을 딛고 선다는 의미인데 그럼 이자가 천자가 된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한 뒤 후환을 없애기 위해 누루하치를 죽이려고 결심 하였다.
그러나 이성량의 소첩 희란이 누루하치를 불쌍히 여겨 위험을 일러 주었고 누루하치는 말을 타고 도망쳤다. 그를 따른 것은 개뿐 이였다. 사흘 밤낮을 달린 말은 지쳐 쓰러졌고 누루하치는 개를 데리고 도보로 계속 도망 쳤다. 어느 숲속에 다다른 누루하치는 지쳐서 혼절하고 말았다. 뒤 쫒아온 군사들은 이성량이 숨은 숲에 불을 질렀고 삽시간에 숲이 불타올랐다. 누루하치를 따라온 영리한 개는 숲속에 흐르는 개울에 들어가 몸을 적셔서 주인 주위를 뒹굴어서 불을 껐다. 불은 온 숲을 잿더미로 만들었지만 유독 누루하치가 쓰러진 주위만은 개 덕분에 타지 않았다. 그리고 숱한 까마귀 떼들이 날아와 앉아 그의 몸을 가려주어 군사들에게 발각되지 않게 해주었다. 병사들이 돌아가자 까마귀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날아갔다. 그가 정신을 차려보니 옆에 개가 까맣게 타서 죽어있었다. 명나라와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누루하치는 부족들을 통합해가며 힘을 키웠고 후금(後金)을 세운 뒤 개의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해 앞으로 자신의 나라에서는 개를 죽이지 못하게 하고 개털이나 개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쓰지 않도록 명을 내렸다.
이리하여 이후 만주족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고 개털 모자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개가 죽으면 사람처럼 장례를 지내고 제를 지내며 까마귀한테는 고기를 잘게 썰어서 대접한다.
이에 반해 한족들은 예부터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예기>에는 상고시대부터 여름 제사 음식으로 개고기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개를 양이나 돼지처럼 제물(祭物)로 까지 써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한족들의 개고기에 대한 각별한 집착을 알 수 있다. 명대(明代) 초기에 쓰여 진 <수호전>을 보면 노지심이 개다리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워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개고기를 절대 먹지 못하게 하고 개털 모자를 못 쓴다는 명을 강하게 내렸다. 중국 한족들의 개고기 식용문화가 쇠퇴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하지만 청대이전부터 개고기를 먹던 습관을 단숨에 꺽기 어려워 식당들은 암암리에 개고기를 팔았다. 양고기를 파는 거처럼 속이고 개고기를 팔았기에 “양 대가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속담이 생겼다. 문 앞에 양 대가리를 걸어놓고 관청을 속이고 개고기를 팔았던 것이다. 그래서 한족들은 지금도 개를 지양(地羊)이라고 부른다.
이런 웃지 못 할 일도 있다. 북양대신 이홍장이 영국런던에 갔을 때 고든장군(G.Gordon)의 기념비에 가서 애도를 드렸다. 장군의 유족들은 중국의 실력자가 방문해 준 것에 고마움을 금치 못해 영국 견(犬)대회에서 일등을 한 우수한 애견을 선물로 주었다. 이홍장은 매우 귀한 개를 준 것에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잡아서 요리를 해 먹었다. 이에 유족들은 물론 온 영국이 깜짝 놀랐다. (당시 영국사회를 경악시킨, 역사에 기록 된 실화이다.) 지면 관계상 개소리 이쯤에서 접어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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