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내시 & 억울한 무당
조선시대에는 의학과 과학이 지금처럼 발달되지 않은 시대인지라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지하는 일이 많았다. 가뭄이 들면 마을마다 기우제를 지내고 거꾸로 홍수가 심해 피해가 많아도 제사를 지냈다. 이런 자연재해가 극심할 경우 임금 스스로가 자신의 부덕을 탓하고 고기를 먹지 않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근신하기도 하고 왕이 직접 나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무당이나 역술인들이 조선시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시골에는 마을마다 역술인이나 무당이 하나쯤은 있어 마을사람들의 길·흉을 점쳐주고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굿을 하거나 혼례가 있을 때 궁합을 보아주고 날을 잡아 주었다. 무당의 경우 강신무와 세습무로 나뉘게 되는데 강신무는 무병들이 들어 이를 낫기 위해 신을 받아 무업에 나선 이들이고 세습무는 무업을 대대로 이어받는 무당을 이른다. 이들 중 강신무가 영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신무는 조상 신 이나 동자 신을 주로 모시는데 특히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을 주로 모신다. 무당들이 모시는 신들 중에는 억울하게 죽은 유명인 들이 많이 있는데 최영장군, 남이장군, 관우장군이 대표적이다. 이중 관우를 모시는 무당이 큰 무당으로 대우 받는다. 이들은 모두 억울하게 죽은 사연이 있고 죽어서 원한에 의해 귀신이 되었다고 믿는다. 신이 내리면 작두 위에서 맨발로 뛰기도 하고 죽은 이의 혼령을 불러들여 죽은 사람과 똑같은 목소리를 내며 죽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세세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역사실록에도 무당에 대한 이야기가 간혹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 숙종 때 무당 막례도 이중에 하나이다. 막례는 무당인데 장안에서 용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점을 치기위해 인근 동리는 물론 먼 지방에서 까지 이런저런 사람들이 물밀 듯이 찾아왔다.
이렇듯 유명해지다 보니 쉬쉬하며 양반가에서도 막례를 찾았고 이중에는 고관대작의 부인들도 많았다. 이러다보니 궁중궁궐 속 궁녀나 비빈들에게까지 소문이 돌았다. 이제 막례는 궁궐에 까지 드나드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대궐까지 무시로 출입하면서 비빈들과 어울렸다. 심지어 대비까지도 그녀의 말을 따르고 수많은 재물을 복채로 내렸다. 이리하여 막례는 큰 부자가 되었고 사치를 부렸다. 이렇듯 지체 높은 여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막례는 간뎅이가 부어오를 대로 부어올랐다. 막례는 궁궐 내에서도 감히 비빈들처럼 가마를 타고 다녔고 비단 옷으로 한껏 사치를 부리고 위세를 떨었다. 점을 치면서 임금만이 입는 곤룡포와 비슷한 옷을 입기까지 했다. 불경스럽고도 무엄한 짓 이였으나 어느 벼슬아치도 감히 나서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이정도로 막례의 위세가 컷 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강직한 이는 있는 법 관리 박세채가 마침내 이를 탄핵했다. 숙종은 대비의 신임을 받는 막례를 어쩌지는 못하고 무당 막례가 대궐을 무시로 출입하는 것을 막지 못한 죄로 내시 신담의 벼슬을 삭탈했다. 언론 무마용이었던 셈이다. 가뜩이나 다른 남자들 다 있는 게 없어 서러웠던 신담은 엉뚱한 희생자가 되었다. “가뜩이나 없어서 서러운 사람을 왜 없는 것(죄)을 씌워 더 서럽게 하나? 잉! 잉! 잉!” 아무튼 막례는 탄핵에도 무사했다. 막강한 빽그라운드 대비가 있기 때문 이였다. 이러던 어느 날 숙종이 갑자기 두창을 앓게 되었다. 그 증세가 심하여 모두가 근심에 빠졌다. 어머니인 대비는 말 할 것도 없었다. 대비는 지극한 정성으로 숙종의 병을 근심하였고 평소에 그렇듯 믿는 막례를 대궐로 불러 들였다. “주상의 환우가 저리 심하니 어쩌면 좋으냐?”는 대비의 물음에 막례가 대답한다. “대왕께서 편찮으시니 하늘에 정성을 보여야 합니다. 대비마마께서 소찬을 드셔야 합니다.” 대비는 즉시 곡기를 끊다시피 했다. 숙종의 병이 낫기만 한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랴 싶었다.
여기에다가 막례는 대비의 더 지극한 정성을 요구한다. “매일 밤 찬물로 목욕하고 긴 시간 기도를 해야 합니다!” 대비는 이에 따랐다. 거의 매일 쫄쫄 굶어가며 그 허기진 몸으로 날마다 밤에 찬물로 목욕을 하고 거의 탈진할 때까지 기도를 하는 정성을 보였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나을 때가 되어서인지 모르나 아무튼 숙종의 병이 나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비가 갑자기 병을 얻고 죽고 말았다. 난리가 났다. 신하들은 “막례라는 무당 년의 말을 듣고 대비께서 무리하시어 옥체가 손상되어 갑자기 승하하신 것입니다. 무당 막례를 잡아 죽이소서!” 벌 떼같이 들고 일어났다. 숙종은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끈질긴 대신들은 수도 없이 계속 주청을 하였다. 대비가 있고 막례가 기세 등등 할 때는 찍소리도 못하던 것들이 이제는 목에 핏대를 세우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흥분을 해서 막례를 죽이라고 달려들었다.
이럴 때는 대신들이 한 고집한다. 숙종은 매일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숙종10년 2월21일 무당 말례의 사형을 감면하여 섬으로 유배시킨 기록이 실록에 있다. ‘요사한 무당 막례의 사형을 감하여 유배를 보냈다. 이에 앞서 전에 유신 박세채가 무녀가 대궐 안에 들어가 기도하고 참람하게 곤복(곤룡포: 임금의 옷)을 입은 일등을 상소하였기 때문에 형조에 명하여 살피게 하였고 그 뒤에 형조판서 윤계가 아뢴 삼퇴신 따위 말을 덧붙여 국문했으나 모두 항변하고 승복하지 않으므로 한 차례 형신하고 유배를 보내라고 명하였다.’ 기록으로 보아 숙종이 대신들이 하도 악착같이 막례를 사형에 처하라 주청하자 이를 못 이기고 윤허 하였다가 그래도 자신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기도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고라 여기고 사형을 면해 준 듯하다.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있다. “무녀가 궁 안에 들어와 제사를 지내고 귀신에게 빈 것을 참으로 놀랍고 또 지극히 불경하므로 형장을 맞다가 죽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기는 하나 어리석고 무지한 것이 남의 병 낫기를 빌다가 사고가 났고 이 때문에 죽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또한 좋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실록에 기록된 숙종의 말이다. 혹심한 형신에도 막례는 끝내 죄를 인정치 않았다. 억울했던 것이다. “기껏 살려 놨더니 날 죽여?”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으면서 사대부들은 무당을 배척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산 대천에서 왕실의 축복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나, 왕이나 대비들의 제사를 집전한 것은 무당들이었고 무속신앙의 뿌리 깊은 전통으로 궁중에 무당이 계속 출입했고 이를 음성적으로 인정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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