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에도 파란만장.
오래전 이야기 이다. 뉴스에서 보니 옛적 코메디 황제 故 이주일氏의 묘가 파헤쳐졌다하는데 이유는 묘지관리비가 체납되었기 때문에 그리 되었다한다. 부인이 시신을 화장해서 가져갔다하는데 일 년 묘지관리비가 겨우 100만원 남짓 이라하는데 그 많은 재산을 남기고간 이의 묘가 이지경이 됐다하니 인간만사 새옹지마란 말이 새삼 되뇌어진다. 생전에 하루저녁에 APT 한 채 값을 벌었다는 이가 사후에 이런 지경이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글을 3年 前 교차로에 기고했던 글인바 신문에는 처음 소개한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작은 사건이 개인의 인생사나 국가의 흥망사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980년부터 약 20년간 한국 코메디의 황제로 군림했던 故이주일(본명 정주일)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강원도 출신의 이주일은 몸져누운 아버지대신 온갖 허드렛일로 가정을 꾸려가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다소 껄렁끼가 있던 그는 춘천고등학교시절부터 평생의 절친한 친구인 전 국가대표감독 박종환감독과 학교의 축구선수로 활발히 활동하기도 했다.
축구에도 꽤나 소질을 보여 결국 경희대 체육 특기생으로 선발된다. 하지만 등록금을 도박으로 다 날리고 진학을 포기한다. 그 후 여기저기 인생밑바닥 생활을 하다 군대에 가게 되었고 군예대에 들어가 쇼 MC로 활약한다. 제대 후 쇼단에 들어갔으나 못생긴 얼굴에 떠듬거리는 말씨로 여기저기서 늘 퇴짜를 맞았고 남들이 펑크를 내면 그제야 대신 마이크를 잡는 스페에 MC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제대로 수입이 없으니 그의 아내 계화자는 월세 300원짜리 상계동 판잣집 쪽방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아이들을 키워야 했다. 결국 여기서도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망우리 고개 넘어 교문리 비닐하우스 사글세방까지로 밀려난다. 이곳에까지 밀려나는 비참함을 겪었지만 나중에 이곳이 구리시가 되면서 이곳에서 살았던 인연으로 이곳에서 국회의원에 출마‧당선되는 인연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비참함속에서 극적인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1980년 2월 TBC TV(現 KBS)의 <야!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이라는 프로그램에 지나가는 행인역을 맡게 되었다. TV에 얼굴도 비치지 않는 엑스트라 역이었다. 녹화현장에서 장시간 대기하고 있던 중 이 프로의 사회자인 곽규석이 괴상하고 웃기게 생긴 놈이 대기실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무료하던 차에 말을 걸었다. 이것이 이주일 인생의 전환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야! 너는 뭐하러 왔냐?” 이 말에 이주일은 유명한 대선배 앞이라 주눅이 들어 겸연쩍게 뒤뚱거리는 특유의 제스츄어로 “나도~ 뭔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면서 신세타령을 했다. 이 우스운 모습을 보고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이때 이 프로그램의 PD 김경태가 이 모습을 보고 즉석에서 단역으로 이주일을 기용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로 시작하는 유명한 노래 APT의 주인공 백인혼혈 가수 당시 대스타 윤수일이 타잔놀이를 하는 장면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옆에 서있는 단역을 맡게 되었는데 처음 TV에 나가는 이주일은 무척 긴장했다. 그래서 실수를 한다. 감독의 ‘큐’사인을 그쪽으로 오라는 소리인줄 알고 가다가 윤수일과 부딪치게 된다. 여기서 끝이었으면 감독에게 야단맞고 쫓겨나는 것으로 끝났을텐데, 비틀거리다가 연못에 빠져버린다. 그런데 대반전이 이 순간 일어난다. 이주일이 물속에 빠졌다가 당황하면서 얼굴을 내미는 모습이 너무나 우스워 편집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파를 탄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콧대는 내려앉고 숭숭 빠진 앞대머리를 가진 중년사내가 뱁새눈에 울상을 하고 낭패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온 국민이 순간 빵! 터졌다. 이주일의 시대가 막이 오르는 순간이다. 특유의 목소리로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뭔가 보여 드리겠습니다’‘일단 한번 와 보시라니깐요’‘따지냐?’‘콩나물 팍팍 묻혔냐?’등 등 이주일이 한 마디하면 즉시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었고 <슈지큐>라는 음악에 맞춰 오리궁둥이를 흔들며 추던 특유의 춤을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당시 신문기사에 ‘선생님에게 야단맞기 위해 불려나가는 초등학생들조차 오리궁둥이춤을 추며 나와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한탄까지 나올 정도였다.
싸이의 말춤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이 춤이 인기가 있었던 것이다. 필자도 이 춤을 출줄 알지만 보는 이들의 충격을 감안하여 자제해오고 있다. 혜성같이 나타나 2주일 만에 톱스타가 되자 예명도 이주일(본명 정주일)로 지었다. 방송 3사를 태풍처럼 휩쓸면서 특유의 몸 개그로 온 국민을 자빠지게 했다. 많은 영화와 음반을 냈고 퇴계로 2가에 있던 퍼시픽호텔의 극장식 나이트클럽 홀리데인서울, 충무로의 초원의 집 등등의 업소에서 이주일을 출연시키기 위해 사과박스에 현금을 담아 선금으로 주며 사정을 했다. 이때 한번 받는 선금으로 흑석동에 APT를 1채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대단하다.
결국 나중에는 직접 나이트클럽을 운영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기쁨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큰 아픔도 겪었다. 그의 인생의 2번째 큰 전환기는 故정주영 현대그룹회장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다. 강원도출신이라는 공통점을 내세워 정회장이 적극 이주일 포섭에 나선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결국 구리시에 출마하였고, 16일의 선거운동만으로 여의도에 입성하는 첫 코메디언 출신 국회의원이 되었다. 처음 정주영회장이 통일국민당 신당창당 발기인대회를 할 때 정회장의 끈질긴 요청에 발기인대회에 참석하고 난 뒤 이런 농담으로 사람들을 웃겼다.
“발기인대회라고 해서 발기가 잘되는 사람들이 모여 뭔가 좋은 일을 도모하는지 알았어요! 그런데 가보니 죄 발기가 안되는 분들만 모였더라구요. 정주영회장님, 김동길교수님 죄 노인분들 뿐이고 더군다나 강부자여사님까지 계시더라구요. 어떻게 죄 발기가 안되는 사람들끼리 모여 발기인대회를 하는지 기가 막히더라구요!”결국 정주일의원은 1996년 “정치권에 와서 코메디 공부 많이 하고 간다”라는 의미심장한 명언을 남기고 SBS 심야토크쇼 <이주일 투나잇 쇼>로 코메디언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2001년 갑자기 폐암진단을 받았고 담배 펴서 자기 같은 꼴 되지 말라고 하며 금연운동에 매진하다 이듬해 8월 27일 국립암센타에서 숨을 거두었다. 한 인간의 삶이 어쩌면 이렇게 극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의 평생이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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