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딸 만나러 가야겠어요!
몇 년 전의 일이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분이 필자를 찾았다. 눈이 크고 오똑한 코에 흰 피부를 지닌 미남형 남성이었는데 아무렇게나 덥수럭하게 자란 수염이 흰 피부와 대조되어 이이의 인상을 더욱더 창백해 보이게 한다. 아무 말 없이 생년월일시를 내밀며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더니 휴~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필자 역시 묵묵히 이이의 사주기둥을 세우고 주역 상 쾌를 짚으니 ‘복지곤’의 쾌다 ‘록록부생 불지안분’이니 ‘내가 앉아 있는 터가 흔들린다’ 좋은 시절 다 지나가고 쓸쓸히 홀로 길가의 낙엽이 되어 뒹구는구나’ 라고 해석 될 수 있고 이이의 운로(운의 흐름)를 짚어보니 처 궁과 자식 궁에 작년 무렵 원진과 충살이 치는 운이어서 처와 자식에게 큰 우환이나 사고가 있어보였다. 다시 한 번 천천히 운의 상태를 살펴본 뒤 필자 왈 “작년에 집안에 큰 우환이 닥치는 운세여서 처나 자식에게 우환이 닥치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을것 같은데 혹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라고 물은 즉 이렇다 저렇다 아무 말없이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다.
이런 경우 필자가 계속 운을 해석해 나가기가 어렵다. 역학이라는 것이 해석학, 통변학이기에 나온 상에 대해 바라보는 각도에 의해 이야기가 180⁰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통변을 얼마나 정확히 잘 하느냐에 따라 ‘훌륭한 역학자(易學者)’ 가 되느냐 ‘엉터리 점쟁이’ 가 되느냐가 결정되기에 그러하다. 만약 통변이 잘못 되었다면 즉시 보는 각도를 바꿔서 풀이해 나가야 모든 것이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 말이 없으니 필자도 묵묵히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혹시 필자의 통변이 전혀 잘못 되어서 실망해서 아무 소리 없을 수도 있기에 그러했다. 한참 아무 말 없다가 고개를 드는데 보니 닭 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처음에 했던 말을 되풀이 한다.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사연은 이렇다. 이분은 충남 천안 사람으로 경주 김씨다. 김 선생은 가난한 집안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고등학교 때 부터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주 사범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 후 교직에 잠시 있다가 사촌 누이의 권유로 LA에 이민 오게 되었고 사촌 누이의 사업장이 있던 자바시장에서 미국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누이의 소개로 미국에 유학생으로 와 있던 처녀를 만나 결혼하였고 둘 사이에 딸 하나를 두게 된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이다 보니 줄줄이 딸린 어린 동생들 때문에 부담이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다 한다. 수입의 거의 절반 이상을 집에다 부쳐 주어야 하니 맞벌이 임에도 입에 겨우 풀칠하기 바빴다. 이것이 노상 부인에게 미안했는데 천만다행으로 부인은 이것에 대해 전혀 불만스러워하지 않고 ‘부부가 된 이상 당연히 지어야 할 공동부담’이라고 이야기 해 주어서 부인에게 너무나 고마웠다한다. 이렇듯 착한 아내를 만나게 된 것도 큰 복이라고 생각하며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냈다.
부인은 마음씨만 이쁜게 아니고 외모도 이뻐서 고생 속에서도 이쁜 부인만보면 ‘혹시 이게 꿈이 아닌가?’ 싶어서 꿈에서 깰까 두려울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딸까지 얻었으니 평생 처음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출근해서 오후 3시까지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집에 가서 잠시 쉬며 식사를 한 뒤 아르바이트 하는 식당에 출근해 밤 10시나 11시까지 일하는 강행군이었지만 아내와 딸만 생각하면 늘 행복했다. 아내도 아이를 키우면서 틈틈이 모회사의 경리업무를 파트타임으로 해 내면서 남편을 도왔다. 이런 눈 코 뜰 새 없는 세월이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김 선생에게 부탁을 했다. ‘여보! 이번 여름에는 꼭 한국에 한 번 다녀오고 싶어요. 우리 가영이 태어나고 나서도 한국에 계신 부모님에게 한 번 보여드리지도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요.....’ 아내의 이런 부탁에 비록 경비 부담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큰 맘 먹고 아이 데리고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물론 자신도 함께 온 가족이 다녀오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어려운 살림에 감당이 어려울 것 같아 아내와 딸내미만 보내기로 한 것이다. 자신을 만난 이후 한 번도 편하게 쉬어 보지도 못한 아내에게 미안했고, 자신의 이쁜 딸을 한국에 계신 부모님과 장인 장모께도 보여드리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리던 차라 큰맘을 먹은 것이었다. 한국으로 가기 며칠 전부터 아내는 들떠서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한다. 아내 역시 가난한 집의 막내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고학을 했고 가난에 고생하는 늙은 부모님을 늘 맘에 걸려했기에 비록 싼 선물이지만 이것저것 포장 보따리를 꾸며 놓고 행복해했다.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한국에 나가서 식구들도 만나보고 선물도 드리면서 즐거워했던 것은 좋은데 마침 한 여름 더위가 푹 푹 찌던 때인지라 친정인 충주 근처의 강가에 물놀이를 갔다가 딸아이가 물가에서 놀다 미끄러져 급류에 떠내려가자 아내가 구하려고 뛰어들면서 결국 모녀가 익사하는 사고가 나고 만것이다. 상담 말미에 김 선생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것을 무던히도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어떻게든 모진 세상 참아 보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을 ...... 아무래도 이제는 아내와 딸을 만나러 가야겠어요!”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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