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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역사 속 악연

2021.04.14



        

     

                  역사 속 악연



  조선후기 정조의 신임 속에 승승장구하다 천주교(서학) 연류혐의로 긴긴 세월 귀향살이를 했던 조선시대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228권이 넘는 막대한 분량의 대저술가이기도 한 다산 정약용과 정승까지 지냈던 서용보의 끈질긴 악연은 사람과 사람사이에 형성되는 인간관계라는 氣(기)가 인간의 운명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1794년 이해는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을 정도로 매우 어려운 해였다. 정조는 경기도 각 지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수령들의 잘잘못을 살펴보고 백성들의 괴로움을 구제하라 명했는데 다산은 경기도 지방을 암행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서용보는 서울에서 수원화성에 이어진 강변 일곱 개의 읍에서 관청곡식을 지나치게 비싸게 팔면서 임금의 행차가 많아 도로를 보수할 비용이라고 이유를 대었다. 하지만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에 행차할 때 쓰는 도로는 이곳이 아님에도 그렇게 핑계를 대어서 백성들의 원망을 임금에게 돌리는 짓을 하며 사욕을 채웠다. 정순대비의 신임이 높았던 서용보는 후에 우의정에 올라서 다산을 재판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무튼 권세가인 서용보의 탐학을 다산 정약용은 정조에게 보고한 뒤 탄핵을 권한다. 왕실의 최고어른인 정순대비의 빽으로 탄핵을 면했지만 이때부터 다산에게 앙심을 품고 평생 동안 다산이 하는 일마다 방해를 놓고 음해하기 시작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사정기관에서 사정을 할 때 서용보 같은 거물은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게 상례다. 아무리 암행어사라고해도 힘없는 시골 현령이나 사또는 출두하여 잡아 꿇리고 치죄하곤 하였으나 관찰사 정도 되는 거물은 손대기가 어려웠다. 대개의 경우 이런 거물의 비리가 발견되면 은근히 접근하여 이러이러한 문제가 발견되었는바 영감님의 이러저러한 점을 감안하여 묻고 가려하니 나중에 자신을 좀 키워 주십사하는 미래의 보험용으로 사용되곤 했다. 


허나 고지식하고 청렴한 정약용은 눈치코치 없이 정면으로 서용보의 탄핵을 논하고 치죄를 계속 청했다. 이렇게 되니 정순대비에게도 찍히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지나치게 깨끗한 업무수행이 탈을 낳아 일생동안 마가 끼는 불행을 만든 것이다. 다산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영의정 체제공이 갑자기 죽고 정조마저 1년 뒤 갑자기 사망하자 반대세력의 대반격이 시작된다. 1801년 봄, 신유사옥이 일어나 다산 3형제가 모두 체포되어 국청의 심문을 받고 정약종은 참수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귀양을 떠나게 되었던 이때 대부분의 대신들이 정약전과 정약용은 무고하니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재판관인 서용보가 강력히 반대하여 석방되지 못하고 귀향을 떠나게 된다. 그 후 1803년 강진에서 유배 살 이를 하던 정약용을 풀어주라는 정순대비의 명령이 떨어졌지만 이번에도 서용보가 강력히 반대하여 실현되지 못한다. 


그 후 1810년 정약용의 아들 학연이 나라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해배 명령이 또 떨어졌으나 서용보의 조정을 받은 사헌부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다가 그 뒤 서용보가 벼슬에서 물러난 무인년 1818년에야 마침내 다산은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 올 수 있게 되는데 이 십 여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지독하게 그리고 강하게 보여준 서용보의 복수심. 그 뒤끝은 기네스북에 올려도 좋을 듯하다. 정말 뒤끝 장난 아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서용보는 은퇴하여 다산의 고향근처에서 지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사람을 자주 보내고 약이나 음식 등을 보내주면서 오랜 시간의 (횟수로 19년, 만18년)귀향살이를 위로해 주었다. 이건 완전히 병 주고 약주는 셈이요, 때리고 호~ 해주는 격이다. 이때 서용보의 마음속에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옛말에 ‘맞은 놈은 발 뻗고 자도 때린 놈은 웅크리고 잔다’ 고 혹시나 자신은 벼슬에서 은퇴했는데 정약용이 등용되어 자신을 헤코지 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이런 행태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뒤 뜻밖에도 서용보가 영의정에 발탁되어 다시 조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리되자 서용보의 태도가 순간적으로 180⁰ 획 변한다. 정약용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고 미안한 마음을 표시하는 척했던 서용보는 마음이 바뀌어 1919년 겨울 조정에서 다산을 사면 복권시켜 그 특출한 경륜을 백성을 위해 쓸 수 있도록 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그것이 거의 실현 될 무렵 서용보가 다시 판을 깬다. 결국 다산 정약용은 끝내 사면 복권되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된다. 서용보의 무서운 복수심, 끈질긴 뒤 끝, 자신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 하나로 평생에 걸쳐 한 인간의 삶을 방해하는 사악한 모습에 몸서리쳐진다. 


여기에 더해지는 가증 스러움. 역겹다! 1819년 다산의 나이 쉰여덟이었다. 만약 이때라도 서용보가 방해를 하지 않아 다산 정약용이 사면 복권되어 학문적으로 인격적으로 완숙해진 그것을 백성을 위한 정책으로 사용되었다면 조선후기의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한 인간과 한 인간이 뿜어내는 기운이 서로 엉켜 역사 속 어떤 그림을 나타내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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