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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사회주의자 산신도사의 최후

2021.06.09




             사회주의자 산신도사의 최후


 산신도사로 유명했던 관상가 조용순氏의 최후는 비참했다. 1990년 1월 19일 간첩혐의로 1952년부터 무려 37년 동안 복역 중이던 교도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37년의 감방 생활은 고통의 연속이었고 특히 64년 뇌출혈로 반신불수에 언어 장애까지 얻은 뒤인 25년의 감옥 생활은 더더욱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한다. 


조용순氏는 1915년 충북 괴산에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머리가 영특하여 서당 공부에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때 한학에 대한 높은 지식과 역학에 깊은 조예를 지니게 된다. 이때 공부한 주역과 관상학은 후에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5세 때 광주학생 사건에 자극을 받아 항일 비밀결사 학생회를 결성 했다가 발각되어 대전 형무소에서 소년수로 6개월의 옥살이를 하게 되고 이때부터 그의 사상은 사회주의에 눈뜨게 된다. 이런저런 일이 겹쳐 먹고 살만했던 농업도 다 소진되고 먹고 살 길이 없어지자 일제말기에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와서 호구지책으로 사람들의 관상을 보아주기 시작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히트하여 '산신도사'로 행세하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이때 그의 민중의식에 눈을 뜨게 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높은 인품을 지닌 사회주의자인 남로당원 김삼룡을 만나 그의 지도로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고 결국 남로당원이 되고 만다. 


자신이 겪어온 밑바닥 생활과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반감, 사회적으로 천시 받는 관상쟁이라는 자기 비하 속에 살던 조용순에게 인류 해방이라는 아름다운 이상은 그의 사상을 지배하게 되었고 자신도 세상에 태어나 가치 있는 역사투쟁의 투사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눈뜨게 했다 한다. 당시 산신도사는 매우 유명해서 주로 부유층 부인네들과 정부 고관마누라 들이 주 고객 이었던바 이들을 대상으로 첩보 활동을 벌려 남로당에 정보를 보고하는 프락치가 된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해방직후 대한 노총 사무국장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꽤나 발이 넓은 '관상쟁이'였던 것이다. 그 후 6.25 사변이 터졌고 당시 후퇴하던 인민군을 따라 1950년 가을 부인과 세 아들을 데리고 월북한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는다. 남쪽 조직과의 연락차 남에 파견되었던 당시 15세의 아들이 행방불명이 되자 1952년 훈련을 받고 정보 공작원으로 3.8선을 넘는다. 아들을 찾아보려는 욕심이 앞섰던 까닭이다. 하지만 월남 즉시 당시 정보망에 걸려 체포되고 그 긴 수형생활이 시작된다. 당시의 분위기를 보아 조용순氏는 즉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 되어야 하는데 관대 하게도 무기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세상에 유명하다는 산신도사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자 당시의 대법원장이었던 조용순氏가 산신도사를 불러 자신의 관상을 보게 했다는 것이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력에 동명이인(同名異人)조용순은 조용순에게 감복했다. 그리하여 '조용순이 조용순을 봐(관상을)주었고 조용순이 조용순을 봐(감형시킴) 주었다' 는 말이 감옥의 좌익수들 에게 유명했고 그 후 사실로 확인된다. 


조용순은 감옥에 갇히고 나서도 이리저리 불려 다니며 바빴다고 한다. 세도 있는 유력자들이 툭하며 불러내어 봐(관상을)달라고 요청을 해대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감방 동료인 같은 좌익수가 조용순에게 강하게 충고한다. "당신의 반 프로레타리아적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민중해방 전선의 투사가 그런 미신적인 일에 매달려서야 어찌하나?" 이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인 조용순을 크게 깨닫고 '관상쟁이의 극복'을 위해 눈물겨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다. 그동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봐 주었기 때문에 간수들도 그를 많이 봐 주어서 감옥 생활에 편리가 있었지만 단호히 이를 박차버린다. 아무리 힘 센 자가 불러내도 이를 거부하고 강제로 끌려가서도 자신의 신조를 굽히지 않고 봐 주지 않으니 점차 불려나가는 일도 없어졌다. 이러자 이제는 하급 관리인 간수들이 조용순에게 봐 달라고 하며 압력을 가했지만 봐 주질 않자 간수들도 반대급부로 조용순을 봐 주질 않고 괴롭혔다. 하지만 조용순은 이후 한 번도 자신의 관상실력을 꺼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감옥생활 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픔이었는데 그동안 특별히 흰쌀밥에 고기반찬 까지 얻어먹던 대우는 그가 유력자 들을 봐주지를 않자 즉시 봐주지 않고 깡 보리밥에 단무지 한 조각으로 즉시 강등되었다. 그는 이런 배고픔을 한시로 달랬다고 한다. 그 특유의 한문 실력을 발휘하여 한시로 감방 벽을 온통 채웠다한다. 그 후 법이 개정되어 (사회안전법개정안) 형기를 다 마쳐도 전향을 하지 않은 좌익수는 평생을 석방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보통 무기수라 하더라도 20~25년 정도 복역하면 감형이 되어 석방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법의 개정으로 사상전향을 거부한 좌익수는 죽을 때 까지 사회에 나올 수 없게 된 것이다. 조용순씨는 전향을 거부하는 댓가로 혹독한 고문과 시련을 겪어야했다. 


흉악범들로 전향 전담반을 만들어 좌익수들을 괴롭혔는데 생손톱 뽑기, 손톱 밑을 송곳으로 쑤시기, 박달 몽둥이로 무조건 두들겨 패서 짓이기기, 한겨울에 물벼락을 씌운 뒤 빨가벗겨서 세워놓기, 혹독한 겨울에 담요 한 장 없이 냉시멘트 바닥에 재우기 등등 인간으로 견뎌낼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주었다고 한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조용순氏는 끝내 전향을 거부했다. 성한 몸도 아니고 반신불수가 되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한 인간에게 사상문제를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행해서는 안 되는 죄악을 범한 것이다. 물론 반대 입장 에서는 '순 악질 빨갱이' 인 그를 결국 사상적으로 굴복 시키려고 하는 면도 있었겠지만 사상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깨부순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그는 사상을 지닌 채 죽었다. 죽어서 무연고 묘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한줌의 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난 뒤 아무도 사체를 인수하려 하지 않아 취해진 조치였다 한다. 빨갱이의 시체는 친척마저도 집에 들일 수 없는 두려움이었기 때문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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