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오래전 이야기다.
故노무현 정권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근태씨가 지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였던 김씨가 사망한 것은 젊은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하게 고문당하고 몸을 망쳐 그 후유증으로 오랜 시간 고생하다가 이것이 지병이 되어 결국 사망한 것이라 한다. 필자는 김근태씨의 자필수기<남영동>이라는 책을 여러 번 보았고 평소 고문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故김근태씨를 고문했다는 고문경관들에 대해 ‘도대체 어떤 놈들인가?’라는 의문이 있었고 그 고문의 중심에 서있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김근태씨 사망 후 얼마안되 <남영동>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영화는 다소 리얼티가 떨어지는 느낌 이었지만 대체적으로 당시상황을 충실히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헌데 이근안 경감으로 분한 이경영이가 너무 잘생겼고 때로는 신사적인 매력을 보인다는 것이 싫었다. 필자가 알기엔 이근안은 큰 덩치에 얼굴은 산적같이 생겼고 무식한 놈이라 알고 있었는데 영화 속 이경영은 무척 지적이고 섬세한 감정을 지닌 것처럼 표현되어 <리얼티>가 없다고 느꼈다. 이 영화가 나온 이후 얼마 안되어 이근안이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라는 자서전을 출판 했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가 자주 가는 단골서점의 주인아저씨에게 특별 주문을 한 뒤 한국에서 배달 되 온 문제의 책을 받아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돈이 아까웠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라는 책 제목과는 전혀 다르게 철저히 자신에 대한 변명과 자기 자랑으로 도배되어 있었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이씨의 무식을 드러내듯 받침도 무척이나 많이 틀렸고 표현력도 공중 화장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어떻게 출판사에서 이런 것에 대한 교정 없이 출간을 하게 되었는지 의문이었는데 책 이곳저곳을 살펴보아도 출판사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이근안이가 <남영동>이라는 영화를 보고 열 받아서(?) 자비 출판한 티가 줄줄 났다. 이 책의 내용은 간단히 말해 <나는 간첩을 무수히 잡은 반공투사이자 영웅이며 세상에 알려진 대로 전기고문은 절대 없었으며 작은 밧데리를 이용한 고문만이 있었을 뿐 인데 사망한 김씨가 전기고문이라는 소리에 놀라 고통을 크게 느꼈을 뿐 자신의 책임이 아니고 자신과 같은 정렬적인 목사를 교단에서 내쫓은 것은 그 교단이 개놈의 자식들만 모여 있어서 일 뿐이다> 라는 주장 이였다.
하기사 필자가 보기에 이씨의 끝의 주장은 맞는 것 같다. 이런 인간백정 놈에게 목사안수를 준 그 교단도 알만 해서였다. 만약 이근안씨가 경찰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씨 자신이나 이씨에게 당한 많은 피해자들에게 서로 좋은 일이였을 터인데 이씨의 경찰 투신은 운명적 이였다. 역사나 개인사에 있어 하나의 작은 사건이 결국 역사를 크게 바꾸거나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을 보고 <운명>이라는 것을 크게 실감하게 된다.
이씨는 인천 송현동에서 출생하였고 대전 한밭 중학교와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 후 공군에 지원 입대하여 만기 제대하였다. 어려서 부터 기운은 무척 세고, 머리는 나빠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운동을 주로하며 지냈는데 합기도와 유도를 주로 연마했다 한다. 이때 배운 합기도 기술은 나중에 경찰이 된 후 팔 관절을 자신의 마음대로 빼 놓았다 집어 넣다하는 고문 기술로 활용이 된다. 제대 후 대전 중도극장 기도주임을 하면서 건들거리다 서울 은평구 응암동 응암 파출소 앞에서 합기도 도장을 열면서 경찰과의 인연이 꿈틀 거린다. 건들거리는 건달패들을 모아 방범대를 만들어 파출소장의 이쁨을 받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파출소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특수 부대원들을 제압하여 소장의 이쁨이 신뢰로 바뀌기 시작했는바 1970년 어느 봄 날 운명의 그날이 닥친다.
상암동 난지도 입구 근처에서 사범들과 술 한 잔 걸치고 얼큰한 상태에서 귀가 중 칼을 들고 택시 운전사를 위협하는 택시강도와 마주치게 된다. ‘사람 살려!’라는 기사의 비명소리를 듣고 칼을 든 강도와 마주했는데 술을 먹은 뒤라 술김에 배짱도 생겼고 자신의 기운에 자신도 있는지라 강도를 때려잡는다. 이 사건으로 서부경찰서로 부터 ‘용감한 시민 상’을 받고 파출소장과 주변의 강력한 추천으로 시험 없이 무술 경찰에 특채된다. 공부는 못했어도 힘이 세니 우연히 시험도 없이 경찰이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술자리가 5분이라도 길어져 이 택시 강도현장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술이 얼큰하여 맨손으로 칼든 강도와 대결하는 만용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이근안씨의 인생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경찰이 되고난 뒤 간첩 잡는 대공부서로 지원하여 자신의 실력을(?)날리기 시작한다. 죄 없는 이들을 잡아다가 고문하여 <조작간첩>을 수없이 만들어낸다 하여 계속 승진을 거듭하여 故김근태씨를 고문할 당시에는 경기도 경찰청 대공분 실장인 경감의 지위에 오른다. 故김근태씨가 전기고문을 수차례 당하면서 몸부림치다가 생긴 발뒷꿈치 의 상처 딱지를 숨겨 우여곡절 끝에 증거로 삼을 수 있었고 정권이 바뀌면서 상황이 급격히 바뀌어 이근안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1988년부터 1999년까지 12년간 도피하며 숨어있다 자수하여 재판을 받은 뒤 수감생활을 한 것은 세상에 알려진 사실 그대로이다.
나중에 자수한 뒤 이씨가 12년간 숨어 있었다고 한 장소는 자신의 집 다락 방 이였다고 하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이씨의 주장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수사기관에는 멍청이들만 있는가? 눈 뜬 장님들만 있었는가? 자신의 집 다락방에 숨어있는 이씨를 경찰이나 검찰은 당시 신문의 표현대로 <못 잡는 것이 아니라 안 잡은 것>이다. 곰처럼 미련한 이씨가 숨어있는 갑갑함을 무려 12년간이나 참은 후 자수했을 때 세상은 또 한 번 떠들썩 했고 7년 복역 후 출소하여 느닷없이 근엄한 목사님이 되어 전국을 돌며 200여회에 걸쳐 전도 사역을 하였고, 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1970년 어느 봄 날 이씨는 그곳에 있지 않았어야 했다. 그날이 결국 이씨를 나락의 삶으로 떨어트린 것이다. <아! 운명이여!>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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