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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탕아에서 독립영웅으로 !

2021.08.30




                  탕아에서 독립영웅으로 ! 


  역사와 신화는 종종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과장되거나 변화가 따르고 심지어 조작되기도 한다.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32세의 짧은 나이로 장렬히 삶을 마감한 이봉창은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게 됨으로써 비로소 민족 영웅인 애국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작은 순간의 선택과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연이 역사를 만든다는 사실을 실감케 한다.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에 서울(경성)용산에서 태어났다. 고로 辛丑年 丁酉月 癸卯日生이며 시는 명확치 않으나 필자가 이이의 일생을 일람해본 결과 午時生 이라 추정된다. 


아버지 이진구 는 건축 청부업과 우마차 운반업으로 많은 돈을 번 실업가였다. 당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건축물들은 경성 곳곳에 세우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건축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새로 이주해 오는 일본인이 많아 주택수요도 급증함에 따라 경성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건설 경기의 호황이 된 되다가 이러한 건축 자재의 운송이 덩달아 급증하자 이진구는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벌기 시작했다. 때를 잘 만난 것이다. 이진구는 여자관계가 문란한 한량 이었는데 본부인 말고도 첩을 둘이나 두어 따로 살림을 차려 주었고,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자들을 건드린 난잡한 성생활로 인해 급기야 ‘악성매독’에 걸려 3년간이나 외부 출입을 못하고 의사를 집으로 불러 치료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 했다한다. 


이러다보니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대리운영 하다 보니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급기야 사기까지 당해 사업과 집문서까지 몽땅 잃어버리고 생계가 어려운 지경에 도달한다. 해서 어쩔 수없이 집안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각자 도생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이봉창은 어려서 부터 일본어에 소질이 있었는바 다행히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점에 어린나이 임에도 취직이 되어 수입이 좋았다. 그 후 운 좋게도 19세에 일본인 지인의 소개로 용산역에 전철수로 취직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자 유곽을 드나들기 시작한다. 아버지의 피를 닮은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 직원과의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그 좋은 직장을 아무 대책도 없이 때려 치고 만다. 이때부터 일본인에게 철저히 대항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로 결심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철저히 일본인 행세를 하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봉창이 직장을 때려 친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일본 직원과의 차별 대우 속에서 불만이 쌓이면서 그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분하에 술과 여자를 섭렵하고 도박에 깊이 빠져 큰 부채를 지게 되었고 그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압박이 심해지자 궁지에 몰린 이봉창은 퇴직금을 받아 빚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색과 도박에 빠진 결과였다. 일본에 건너간 방법도 파렴치했다. 일본에 건너갈 비용이 없던 이봉창은 자신의 조카딸 이은임을 용산철도국을 사직하고 일본으로 귀국 하려는 옛 동료인 후지하타 에게 식모로 데려가도록 설득한 뒤 조카의 급료를 1 년치 미리 가불받아 그 돈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사실상 조카딸을 일본인 에게 팔아먹은 셈이다. 


일본에 건너와서 이봉창은 부두노동자, 철도노동자, 비누가게 점원, 가방가게 외판원, 식품회사 직원 등등 수 십 가지의 직업에 종사하게 되나 특유의 불성실과 주색과 도박에 빠진 방탕으로 쫓겨나기 일쑤여서 항상 생활에 쪼들렸다. 완벽한 일본어를 바탕으로 일본인 기노시타 쇼조로 완벽히 일본인 행세를 했음은 물론이요, 한국인은 만나지 조차 않았고 일본 내 유일한 혈육인 조카딸과도 철저히 담을 쌓고 지냈으며 가족들과도 의절한 채 일본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런 생활이 이어지던 중 어떤 이로 부터 “상해에 가면 프랑스 조계에 우리조선의 가정부(假政府:임시정부)가 있어 조선 사람을 적극 도와주고 취직도 알선해 주는데 영국의 전차회사 매표원으로 취직이 되면 월급을 많이 받는다” 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때 이봉창은 쫓기는 몸이어서 이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이 직전 이봉창은 가방점 외판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지방출장 중 술을 마시고 여자를 사서 오입을 하느라 회사 돈을 축내게 되었고 이를 감당할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아 수금한 돈을 몽땅 챙겨들고 도망을 쳤던 고로 초조한 심정이었는데 외국으로 내빼고 취직도 할 수 있는 그야말로 ‘꿩 잡고 알 먹는’방법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상해로 도망 와서 임시정부를 수소문 하여 찾아가 만난사람이 백범 김구선생 이었다. 이봉창이 중국말과 영어를 전혀 못하기에 영국철도회사 매표원으로 취직을 알선하지는 못했으나 이봉창의 능숙한 일본어와 거침없는 태도, 사나이다운 허풍에 호감이간 김구선생은 이봉창이 천황을 폭살시킬 적절한 인물로 평가한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 하였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한국말(일본인 행세를 하느라 그리됐음)보다 오히려 일본말이 자연스럽고 오입쟁이 특유의 호탕함이 있어 조선인 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을것 같아서 천황행차에 접근 하기가 용이하다 싶어서였다. 


김구선생은 이봉창에게 폭탄 2개를 건네주고 거금 150원을 거사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때 백범에게 한 이봉창의 말이 걸작이다. “제 나이 서른하나 입니다. 앞으로 31년을 더 산다 하여도 과거 반평생동안 방랑 생활에서 맛 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 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으니 이제는 독립 사업에 헌신하는 영원한 쾌락을 얻고 싶습니다.” 였다. 오입쟁이다운 솔직한 고백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백범 김구에게 150원을 받은 이봉창은 이 돈을 미친 듯이 써대기 시작한다. 결국 거사일 전에 돈은 다 거덜이 나고 이봉창은 상해에 있는 백범 김구에게 “미친 듯이 돈을 쓰다 보니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100원을 더 부쳐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뻔뻔하게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믿고, 의심 가는 이에게는 일을 맡기지 않는다’는 평소의 신념대로 김구선생은 이봉창을 끝까지 믿었고 추가비용을 어렵게 마련하여 보냈다. 이 돈을 가지고 역시 매일같이 술집을 드나들며 여자를 사서 즐기고 도박을 하며 실컷 놀고 난 뒤 결국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진다. 폭탄은 예상과 달리 위력이 크지 않아 마차의 밑바닥과 바퀴의 타이어가 약간 훼손되는 것에 그쳤고 유일한 피해라면 근위병이 타고 가던 말의 코에 파편이 튀어 피가 아주조금(손톱으로 긁힌 정도의 상처)났을 뿐이었다. (*유일한 피해자인 이 말은 행군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으나 자기만 피 본 것이 조금 성질이 났는지 빨리 걸었을 뿐이었다 한다) 


일제의 피해는 없었지만 천황에게 조선인 청년이 폭탄을 던졌다는 것은 큰 방향을 일으켜 독립 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었으니 곧이어 터져 나온 윤봉길 의사 사건도 이 영향이 컸다할 수 있다. 아무튼 회사 돈을 횡령해서 외국으로 내뺀 오입쟁이 건달이 한사람(백범김구)을 만남으로서 민족의 독립운동 영웅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작은 인연이 역사를 만드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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