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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고리대금업

2021.08.28

 




                   고리대금업 


 예전에 모 신문을 보니 5년 가까운 지속된 불경기 탓에 미국인 3명중 한 명꼴로 사채를 쓴 경험이 있거나 쓰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코리아데일리뉴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미국에도 고리사채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웠던 경험이 있다. 월급을 담보로 돈을 꿔주는 페이데이 론에서 부터 자동차를 담보로 잡고 돈을 꿔주는 오토론 등 수 많은 고리사채가 있고, 이정도 까지 의 고리는 아니라도 매출 채권을 담보로 돈을 꿔주는 펙토링 업체까지 미국에도 수많은 고리 사채업자가 존재한다. 


오래전 한국에서 이런 사채업세계를 다룬 <쩐의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있었고 박신양이가 그 주인공 역할을 했는데, 고리사채 빚에 시달리다 신용카드로 날을 세워 스스로 자신의 목을 따고 죽는 박신양의 아버지 모습이 드라마 이지만 섬뜩하고 처절했다. 자살한 아버지의 장례식까지 쫓아와 부조금을 빼앗아가는 사채업자들의 무지막지한 모습에서 <샤일락>의 피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런데 개화광명천지인 이곳 미국에서 사채업자의 횡포를 목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필자가 상담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깊은 사연들을 접하게 되는데 이런 고리사채와 관련된 사연도 종종 접하게 된다. 가장 흔하게 보는 고리사채는 유흥업소 아가씨나 맛사지팔러 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급전을 꿔주는 고리대금업자들인바 최소이자가 1개월에 원금의 10%(1할)에서부터 30%(3할)에 이르는 이른바 달러이자 까지 무지무지한 고리의 사채를 뜯어가고 있었다. 


담보로 여권을 뺏아 놓거나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줄줄이 연대 보증을 세워 서로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자가 되게 하는 고도의 수법을 쓴다했다. 돈을 제대로 갚지 못하면 더 열악한 환경의 다른 업소에 떠넘기고 원금을 회수하는 인신매매식의 채권양도양수방식의 수법으로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한다. 영세한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이들도 급하면 사채를 이용하기도 하는데 영세한 봉재공장이 밀집한 지역에는 이들이 받은 체크를 깡 해주는 이른바 첵케싱 업소가 많다하는데 그 이자가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다. 필자가 자주 상담을 하던 꽤 규모가 컸던 모 가방업체 사장님은 사정이 다급하여 생전처음으로 월 1할의 사채이자를 썼던 것이 결국 사업을 망하고 쪽박을 차게 되는 계기가 된 일이 있다. 


이분은 처음 그리 크지 않은 급전을 며칠 빌려 쓰고 곧 갚았는데 이런 경험이 한번 생기자 급한 일만 생기면 고리의 돈을 잠깐잠깐 쓰고 갚고, 다시 쓰고 하는 식으로 하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 는다’ 고 그 데미지가 누적되어 할 수 없이 더 큰 사채를 쓰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부어올라 결국 가지고 있던 건물까지 다 빼앗기고 업체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필자를 자주 찾아와 사채업자들 의 괴롭힘에 대해 하소연 하시곤 했는데 하소연을 듣다 분통이 터져 필자 왈 “아니? 왜 그런 놈들에게 당하고만 계세요? 경찰에 신고해서 싹 잡아가게 하지 않고?”라고 하니 “에고~ 그런소리 마세요. 이놈들이 얼마나 끈질기고 교활한 놈들인데요! 이런 저런 대비 다 해놓고 있어서 그리해봐야 소용없어요” 하신다. 필자가 보기에 아무래도 그놈들에게 이런저런 약점이 다 잡혀서 옴짝달싹 못하시는 것으로 보여 안타까웠다. 결국 시나브로 사업은 시들어갔고 파국이 왔다. 


동서고금을 통해 이런 고리 대금업의 폐해는 늘 있어왔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조에도 이런 고리대금 문제는 계속되어 왔는바 조선시대 역시 지금의 사채업인 대금업이 성행했다. 사채는 필요악(必要惡)으로 상민들이 주로 이용했다. 양반이나 지주, 토호 등은 부를 이용하여 주로 춘궁기에 고리로 쌀이나 돈을 빌려주고 기한이 되면 이를 강제로 징수했는바 사채를 이용하는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이나 상민이었기에 빚을 못 갚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로 인해 사건사고가 많았는데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들을 채권자들이 사사로이 잡아들여 고문을 가하거나 채무자의 딸을 빼앗아 노비나 첩으로 삼기도 하고 기방에 팔아 꿔 준돈을 받아내기도 했고, 채무자가 도망을 가면 그 식구들을 잡아다가 사사로이 린치를 가하곤 했다. 


조선 초기 세종 초 수해로 인해 농사가 흉년이 들자 굶어죽는 백성이 나오고 이로 인해 사채를 써서 고통 받는 백성이 많아지자 사헌부에서 세종에게 사채의 폐해가 심각함을 상소하고 사채 동결 령을 내려줄 것을 신원했다. 이에 세종은 모든 민간의 사채 및 신역을 풍년이 들 때까지 거두지 말라고 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3년에는 사대부 이인한 이라는 이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김제원에게 고리사채를 빌려 주었다가 갚지 못하고 달아나자 그의 처 귀영을 잡아다 가두고 때려죽인 뒤 이를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나무에 매달았다가 당시 포도대장 구일에 의해 적발된 사건도 있었다. 


심지어는 성종 10년 정승 윤필상이 사사로이 의금부 나졸을 시켜 자신의 사채 수금을 하게 하였는바 사채회수 과정에서 나졸들이 채무자를 심하게 폭행하여 채무자가 사망하였으나 상대가 정승임으로 모두가 쉬쉬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에 용감한 대사헌 박숙진이 정승 윤필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윤필상의 집에서 의금부 나장을 시켜 사채를 독촉하여 받아들이다가 살인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의금부를 왕부라 하거늘 어찌 사사로이 부려 살인까지 할 수 있습니까? 윤필상을 죄주소서!” 용감한 일이다. 다들 두려워 나서지 못하는데 대사헌 박숙진은 나선 것이다. 이렇게 되자 변명에 나선 윤필상은 자신은 알지 못하고 부인이 한 일이라고 해서 교묘히 법망을 빠져나갔다. 요즈음도 고위 공직자 청문회 때 부동산 투기나 세금체납 등등의 공직자로서의 윤리성 문제가 논의 되면 많은 이들이 “나는 모르는 일이예요! 아내가 한 일이여서 잘 몰라유!” 하는 식으로 핑계를 대는데 당시도 그런 모습이었나 보다. 아무튼 고리사채 문제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필요악(必要惡)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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