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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의로운 사기꾼

2021.11.06





                                          의로운 사기꾼


 조선 말렵 철종‧고종 시대에 활동했던 유명한 관상가이자 역술가였던 금강도사 민좌호(閔佐鎬)는 후에 정권을 잡는 민비일문(閔妃一門)과는 비교적 가까운 친척이어서 권세를 누릴 수 있는 민씨(閔氏)이기는 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노비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서얼 이였다. 양반출신의 작은댁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나도 서자(庶子)라 하여 홀대받고 벼슬에도 나서지 못하던 시대에 노비인 종을 어미로 하여 태어났으니 그 박대가 심했다. 홍길동이‘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신세’라고 한탄했듯이 서얼은 어미와 같은 동급의 종 취급을 받았다. 자신보다 늦게 태어난 동생들 에게도 그들은 정실자식 들이기에 존대를 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천대는 제사를 지낼 때 확연히 나타났는데 자신의 조카뻘, 손주뻘 되는 이들도 대청마루에 서서 제사를 지내는데 반해 자신은 뜰아래에서 엎드려 절을 해야만 했다. 이런 차별 대우에 분노하던 그가 감수성이 예민한 10여세가 되자 반발심으로 터져 나왔다. 결국 13세 때 가출을 하게 되었고 이곳저곳을 떠돌다 산수도인(山水道人)이란 이름의 도사를 만나 15년 동안을 금강산에 들어가 사사한 뒤 하산하였다. 이때 주로 공부한 것이 관상과 역학 이였다. 세상에 내려와 활동을 시작하자 그를 겪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영특한 신통력에 감탄했다 한다. 금강산에서 수련 했다하여 금강도사란 호칭을 얻은 그는 일반적인 역술인 하고는 전혀 다른 행세로 후에 그 이름을 전하게 된다.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워 그들을 규휼함에 재산을 물같이 버렸지만 권문세가들 에게는 한없이 교활하여 사술로서 그들의 재물을 편취하였다. 이렇게 사기로 편취한 재물을 한 푼도 수중에 남기지 않고 어려운 이들의 규휼에 사용하였다. ‘의로운 사기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병색이 짙은 꾀죄죄한 선비가 상담을 청해와 그이와 함께 선비 집에 당도해보니 집이라기보다 움막에 가까울 정도로 다 쓰러져 가는 초막이였다. 애처롭게 자신의 입을 쳐다보는 선비에게 금강도사는 “선비께서는 관상을 보실 겨를이 없소! 쓸개가 썩고 있소. 우선 병을 고치시오. 병을 고친 연후에 관상을 보아 드리겠소. 선비께서는 나중에 나라에 중히 쓰일 상을 가지고 있으나 이 고비를 못 넘기면 이게 무슨 소용이겠소?” 라고 하더니 자신의 배에 두른 전대를 통째 넘겨주며 “이 돈을 갖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땅꾼을 찾으시오. 동면하는 뱀을 구해 푹 고아 드시도록 하시오. 돈은 충분할 터이니 돈을 아끼지 말고 구해 드시오. 병이 나은 뒤 입신출세하고 난 후 나를 찾아오셔서 돈을 갚도록 하시오.” 라고 하였다. 


선비는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고 후에 입신하여 모 지방 현령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금강도사를 만나 후사하였다. 금강도사는 일정주기로 집에 돈을 쌓아놓고 어려운 이들을 불러 들였는데 소금장수,물장수,젓갈장수,채소장수,엿장수,품팔이꾼 등등 영세한 백성들 이면서 이곳저곳을 떠도는 직업을 지닌 이들이 주(主)였다. 이들에게 당장 호구지책 할 수 있도록 몇 냥씩의 돈을 골고루 나누어 주고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지극히도 구호가 필요한 이를 보면 자신에게 알려 달라 일렀고, 그런 이들의 소식을 접하면 천리 길도 마다않고 달려가 원호하였다. 금강도사는 자신이 전생에 악업을 너무 많이 쌓았기에 이런 식으로 업을 닦아 나갔던 것이다. 


세상에 이름이 높아 지다보니 이런저런 이유로 권문세가 대갓집에서도 금강도사를 은밀히 찾았는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대갓집 마나님께서 은밀히 금강도사를 불렀다. 이집은 탐관오리 백낙신의 집으로서 경상우병사를 지내며 신유년(辛酉年 철종12년) 환곡을 할 때 일부러 값을 올려 4천1백냥을 착복했고, 병고전(兵庫錢)3천8백냥, 병고미 1천여석, 구폐미추가분 7천냥 등등 수없이 많은 공금을 착복하였고, 촌민들이 뼈 빠지는 고생을 하여 개간하였고, 이미 수 년 동안 농사를 지어오던 수천 두락의 농토를 모경(冒耕)이라 하여 빼앗고, 그동안 농사지어 먹은 값을 내라고 하여 벌금으로 2천냥을 징수하여 꿀꺽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철원,진해,함안,창원 등의 읍민들 가운데 부자인 자들을 골라 아무 죄도 없이 옥에 가두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고 하며 죽도록 매질을 하여 수없이 많은 돈을 공갈‧갈취하였고 춘궁기 때 배곯는 백성들에게 돈을 꿔준 뒤 열배로 받아내는 등 이건 관리가 아닌 순강도 놈 같은 짓을 해 처먹었다. 


탐관오리라 해도 그 정도가 도를 넘어서자 이런 횡포를 견디지 못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진주민란’이다. 이 사건으로 민란의 주모자 이계열을 비롯한 13인이 효수형(목을 자르는 형)을 받고 19인이 유배되고 42인이 처벌받았다. 억울한 희생자들인 것이다. 이렇듯 능지처참을 해도 모자랄 놈이 백낙신이었는데 그는 이 사건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중이였다. 이 때 이놈을 살려보려고 그 마누라가 금강도사를 불러 살길을 모색하려한 것이다. 부인이 아무 말도 안했는데 금강도사는 쾌를 짚은 뒤 이 사주팔자의 주인공(백낙신)이 감옥에 있다는 것, 백씨 성을 가졌다는 것, 억울한 이들의 돈을 많이 빼앗고 여럿을 죽고 상하게 했다는 것을 줄줄이 이야기하자 그 신통함에 놀란 부인은 남편이 살 수 있는 길을 알려달라고 매달렸다. 


금강도인은 어차피 이놈이 가벼운 처벌을 받고 얼마안가 다시 관직을 차지할 것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반드시 목이 잘려 죽을 것이라고 겁을 준 뒤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한을 달래주어야 살 수 있으니 산에 가서 재물을 바치고 빌어야 됩니다. 5만냥의 돈이 꼭 필요합니다. 아니면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못을 박았다. 금강도인은 속으로 “백낙신 같은 놈은 능지처참을 해도 모자랄 놈이다. 놈의 뼈다귀 속까지 쪽쪽 빨아내야겠다. 이놈에게는 반드시 숨겨 논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있으렸다! 죽기 싫으면 돈을 내 놓겠지!” 라고 계산하였다. 사술로 사기를 친 것이다. 그 후 5만냥의 돈이 금강도인의 손에 들어왔음은 물론이다. 백낙신은 살았다. 


지운이 살 운이어서 산 것도 모르고 금강도인의 도술 때문에 산 것으로 믿고 다시 벼슬에 나갔다. 나가서‘개 버릇 남 못준다’는 속담대로 또 토색질에 열중하였다. 한꺼번에 나간 목숨 값 5만불을 채워 넣으려니 잠을 설쳐가며 부지런을 떨어야했다. 아주 개자식이다! 아무튼 금강도인은 5만냥을 이곳저곳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뿌려댔다. 그리고 52세가 되는 생일날 아침, 자신의 수가 다 되었고 그동안의 선업으로 자신이 지은 악업이 어느 정도 씻긴 것을 알고 조용히 몸을 씻고 단정히 앉아서 숨을 거두었다. 홍길동과 같은 의적의 삶이였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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