鷄林黃葉 鵠嶺靑松(계림황엽 곡령청송)
孤雲(고운) 최치원은 유‧불‧도에 능통했던 신라말엽의 천재로 우리나라 역사상 정신세계의 최고봉에 이르렀던 몇 안 되는 천재 중 천재였다. 최치원은 신라 6두품 집안 출신으로 태어났다.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6두품은 신라 17관등가운데 6등급인 ‘아찬’이상의 벼슬은 할 수 없었다. 이에 골품제라는 신분의 벽에 부딪쳤던 6두품 출신중에는 당나라 유학이 유행이었다. 옛날 옛적인 신라말엽인 서기 837년 그 당시 한 해 동안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유학생이 216명에 이를 정도였으니 그 열풍을 짐작할만하다.
12살 때 최치원도 당나라 유학을 떠났고 공부에 전념하여 유학 6년만인 874년 당나라의 외국인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수석합격(장원)하는 영예를 누리고 2년 뒤 876년 율수현의 현위로 관직에 올랐고 이후 회남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라는 높은 지위까지 오른다. 이때 소금장수였던 황소가 반란을 일으켜 장안을 점령하고 스스로 황제를 칭하자 고변은 이를 토별키위해 출정하는바 이때 최치원을 종사관으로 발탁한다. 이것이 최치원이 당나라 문명을 크게 떨친 계기가 된다. “황소가 읽다가 너무 놀라서 침상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토황소격문>은 이렇게 해서 지어졌다. 이글은 황소를 격하게 성토하여 겁을 주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한 명문장으로서 지금 중국 땅에 우리나라에도 없는 최치원기념관이 세워질 정도로 유명한 글이 되었다.
황제가 황소의 난이 진압된 뒤에 최치원에게 정5품 이상에게만 하사하는 붉은 주머니인 자금어대를 하기까지했다.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귀국한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문명을 크게 떨치고 황제에게까지 인정받은 글 솜씨로 신라의 헌강왕에 의해 신라조정에서 당에 올리는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인 ‘시독겸 한림학사’에 임명된다. 하지만 헌강왕이 승하하자 진골 귀족들의 압박에 스스로 물러나 외직인 지방의 태수로 전전하다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다. 이후 경주의 남산,강주,합천의 청량사,지리산 쌍계사,동래의 해운대 등에서 머물며 수련하고 저술활동 등에 몰두한다. 이후 최치원은 우리나라 정신계 수련자 중에서 최초로 도통하여 신선이 된 정신계의 큰 스승으로 모셔지게 된다.
최치원은 외직에 머물 당시만 해도 망해가는 신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894년 진성여왕에게 구체적인 나라 개혁안인 시무책 10여조를 건의하였고,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들여 이 제도로서 나라를 개혁해 보려고 하였으나 중앙 귀족들의 반대로 좌절하고 만다. 이때 최치원은 망해가는 신라에 대해 미련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며 도를 닦은 것이다. 그는 예언서에서 鷄林黃葉 鵠嶺靑松(계림황엽 곡령청송)이라는 예언을 하였는바(동국여지승람21권) 계림은 경주에 있는 삼림으로 신라의 국호계림은 이 숲에서 연유하므로 계림황엽은 계림은 누런 잎으로 바뀌고, 즉 신라의 쇠멸을 의미하고, 곡령은 개성의 진산 송악이므로 고려는 왕건의 선조가 이곳에 청송을 심어 장래 후손 중 왕흥의 기운을 양생하였다고 전해지는 까닭에 곡령청송은 고려의 융성을 의미하여 신라는 망하고 고려가 세상을 통일할 것임을 예언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신라왕은 분개하였고 그와 그의 가족들을 죽이려고 추적하였다.
이에 최치원은 가야산 해인사에 가족들과 은거한 뒤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예언대로 얼마되지 않아 세상이 바뀌었고 삼한은 고려로 통일되고 왕건은 개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이에 최치원의 예언서를 아는 이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최치원은 현실에서는 좌절한 천재였다. 당나라에서 문명으로 크게 입신하였지만 이방인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다. 이런 이방인으로서의 한계는 고국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되어 결국 향수병으로 당나라에서 보장된 부귀영화를 다 벗어던지고 귀국한다. 허나 고국에 돌아와서도 현실은 녹녹치가 않았다. 삼국사기에 보면 ‘최치원은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바가 많아 이러한 지식과 경험을 고국신라의 발전을 위해 써 보려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귀족들의 의심과 시기가 많아 소용없었다’라고 적고 있다.
결국 이러한 시기와 견재에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만다. 당시 헌강왕이 귀족세력을 견재하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귀족들과 사사건건 대립하던 시기에 최치원은 왕의 신임을 받는 헌강왕의 측근 이였는바 헌강왕이 죽자 최치원에 대한 귀족들의 압박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최치원은 중앙요직을 벗어버리고 외직인 태수로 이곳저곳을 떠돌 면서도 신라의 부흥 책을 진성여왕에게 건의했으나 무산되자 결국 이마저 벗어던지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천재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리 뛰어난 천재나 영웅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자기의 기량을 결코 펼칠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수없이 많은 이들을 상담해 오면서 매우 뛰어나고 훌륭한 사주팔자를 지녔지만 아쉬웁게도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한평생 울분과 실의 속에 살다 사라져가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사주팔자의 원국(사주 여덟글자)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 팔자가 나아가는 길인 운로가 엉망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비록 사주팔자가 다소 못났어도 이 사주팔자가 나가는 운로가 훌륭할 경우 무난한 일생을 살다가는 이도 보았다. 뛰어나 사주팔자를 타고났으나 이 사주팔자라는 자동차가 달려야 하는 도로인 운로가 신통치 못해 좌절한 옛날의 천재 중 천재이자 도통하여 신선이 된 최치원 선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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