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날이 지났는데 왜 안 죽나?
1614년(광해군6년) 이수광 이 쓴 <지봉유설>에 있는 길행에 대한 기록에는 “의술과 복서는 모두 중요한 것으로 의술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복서는 흉화(凶禍)를 피해 길행(吉行)으로 나가게 한다.”라고 적혀 있다. 조선시대 초기 국왕이나 사대부들은 음양오행을 바탕으로 한 역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조선 건국 시 도읍을 정하고 능의 위치를 찾는데 풍수지리에 적합한 지역인가를 따졌고 제례를 지내거나 왕비를 맞아들이는 국혼에 길일을 잡는 것을 매우 중요히 여겼다. 주역의 역경이나 음양오행설이 모두가 천문·지리·풍수·인간의 길흉화복을 다루었기에 민간에서도 역시 신앙처럼 믿고 따르는 이가 많았다. 서울이나 지방 어디를 가나 마을마다 무당이나 역술인이 꼭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꼭 필요한 것 이였다. 마을 초입에 있는 성황당에서는 매년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 굿을 지내고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이 옷매무시를 고치고 경건히 행운을 빌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사회의 혼란이 심해지자 도탄에 빠진 민중을 감언이설로 현혹하여 사기를 치는 이들이 많았다. 주로 맹인 점쟁이나 무당, 그리고 땡초들이 이런 일을 많이 저질렀다. 이수광이 점을 치는 것이 ‘나쁜 것에서 벗어나 좋은 것으로 가게 하는 것’이라고 쓴 것과는 전혀 다른 행태였다. 19세기 학자인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州衍文長篆散稿)>에는 특히 맹인 점쟁이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는 그 글에서 쓰기를 “우리 국조에 들어와서 맹인 점쟁이에 대해서는 홍계관, 유은태, 함순명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합천맹인 등을 맹인 점쟁이의 시조로 친다. 그들은 산통과 점대를 휴대하고는 서로 지팡이를 짚고 길거기를 다니면서 ‘신수들 보시오! 문수! 문수!’라고 외치며 다니는데 그 소리가 마치 노랫소리 같아서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도 맹인이 지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이중 가장 유명했던 점쟁이는 홍계관이다. 홍계관은 경기도 양주 출신이다. 홍계관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사고로 사망하여 유복자로 태어났다. 옛날에는 연세 드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눈병이 꽤나 많았다. 필자도 어릴 적 ‘다레끼’라는 눈병을 툭하면 앓았던 기억이 나는데 당시는 위생환경이 좋지 못하고 예방의학 지식이 거의 없어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옛날에는 눈병으로 인해 지금보다 훨씬 더 고생들을 했을 것이고 제대로 된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실명하는 일도 종종 있었던 듯하다. 아무튼 홍계관은 어릴 때 눈병을 심하게 앓아 장님이 되었고 홍계관의 어머니는 ‘장차 이 아이가 어떻게 살아?’하는 걱정에 침식을 잃을 정도였다. 그러다 홍계관이 어느 정도 장성하자 호구책을 마련 할 수 있게 궁리하다 장님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점술이나 안마를 배우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그 지역에서 고명한 한 역술인을 찾아 우리아들이 “먹고 살길을 열개해 주십시요!”라고 머리를 조아리고 애원했다.
역술인은 청상과부로 아들 하나 키우는 어머니가 가여운데 더군다나 아이가 장님이라니 참으로 불쌍타 여기고 홍계관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홍계관의 어머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의 농사를 도와주고 부잣집 허드렛일, 빨래 등을 거들어 양식을 만들면 역술인 집에 부지런히 갖다 주며 수업료를 대신했다. 눈이 보이지 않을 뿐 총명한 홍계관은 술사에게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역술을 배웠다. 허나 나이가 좀 들자 생각하기를 “내 눈앞에 있는 것도 못 보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앞일을 내다보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남들이 뭐라 생각하겠는가?”하는 회의가 들어 매우 의기소침해 졌다. 공부가 시들해지는 것을 느낀 역술인이 어머니에게 귀띔을 했고 어머니가 찾아와 “내가 청상과부가 되어 너 하나 의지해서 키웠는데 눈까지 멀었고 이제 유일한 생계수단이 될 공부마저 안하겠다고 하니 우리 모자 더 이상 구차스럽게 살지 말고 콱 죽어버리자. 내가 죽고 나서 너 혼자 이제는 살 길이 없으니 내가 너를 두고 죽을 수도 없고 어차피 한번 죽을 것 이제 같이 죽자구나.”라고 하며 슬피 울었다. 홍계관은 마음을 고쳐먹고 자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어머니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하며 모친을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홍계관은 이 일이 있은 후 불철주야 더욱 더 공부에 매진했다. 이렇듯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스승인 역술인이 “이제는 너의 공부가 충분히 익어 내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라고 하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홍계관은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반가운 해우를 한 뒤 지붕에 하얀 깃발을 내걸고 점치는 일을 시작했다. 홍계관은 역술로만 점을 치는 것이 아니라 장님들에게 특별히 발달된 청각으로 손님들의 목소리를 듣고 성격까지 판단하여 점을 쳤기에 적중률이 높았다. 신통하다. 용하다. 장안에 널리 소문이 났고 명사들까지 그를 초청하여 운수를 보았다. 가난에서 벗어났음은 물론이다.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유명한 정치가인 상진(尙震)도 그의 단골 이였는데 상진이 물었다. “내가 언제 죽을 것인가?” 홍계관은 상진에게 어느 해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점괘가 엇나간 적이 한 번도 없기에 상진은 죽을 해가 다가오자 죽음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 해가 지나도록 죽지 않았다.
상진이 홍계관을 불렀다. “내가 왜 안 죽나?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잖은가?” 홍계관은 갸우뚱 하며 이렇게 물었다. “혹시 대감께서 최근에 하늘을 감동시킨 일이 있습니까?” 상진이 대답하길 “나 같은 영감이 무에 하늘까지 감동 시킬 일이 있겠는가? 다만 대궐에서 일을 마치고 퇴궐하던 중 우연히 길에 떨어진 붉은 보따리를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었는데 그는 대전의 수라간 별감으로 자식의 혼사에 사용하려고 대궐의 기물인 금잔 한 쌍을 잠시 빌려 사용하고 되돌려 놓으려고 하다 그만 분실하여 앞이 깜깜했다 하더군. 대궐의 중요기물을 허가 없이 멋대로 사용하다 분실하면 사형(死形)을 당하는데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더군!” 홍계관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대감님이 그 자의 목숨을 살렸기에 하늘이 수명을 늘려 준 것 같습니다!” 상진은 그 일이 있은 뒤 15년을 더 살았다. 홍계관은 단순히 점을 잘 쳐서 여러 사람의 문헌에 기록이 남은 게 아니다. 그는 당대의 재상인 상진과 교류할 수 있을 정도로 학문이 높았고 점치는 기술로 부당하게 치부하지 않아 신망이 높았기에 두고두고 후히 평가 되어 온 것이다.
자료제공 : GU DO WON (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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