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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45년만의 반란-

2019.06.03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45년만의 반란- 


오여사님의 남편은 가정 내의 폭군 이였다. 25세에 결혼 한 오 여사님은 결혼이후 45년 내내 남편에게 숨 한번 크게 내쉬지 못하고 순종하며 사셨다.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고 5남매 모두 좋은 대학에 진학 시켰고 졸업시켰으며 모두 결혼 시켜 부모로서 이제 해야 할 일은 다했다. 남편은 충남서천 출신으로 부유한 땅 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 형제의 귀여움 속에서 귀하게 자랐고 이기적인 성격이 되었다. 대학 졸업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산으로 이때 벌써 갑부라 할 만큼 큰 재산을 물려받고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런 남편과는 상대적으로 오 여사님은 집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고등학교도 겨우겨우 졸업할 만큼 고학을 해야 했고 대학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렇듯 극단적인 반대의 환경인 이들 부부가 연이 닿은 것은 서천 해수욕장에서였다. 친구들과 해수욕장에 놀러온 오 여사님을 보고 첫눈에 반한 남편이 서울까지 쫒아와 끈질기게 따라다닌 결과 둘은 부부가 되었다. 결혼할 때 살림장만을 할 형편도 못되는 오 여사님 에게 남편은 형제들 몰래 돈까지 쥐어주고 신부체면을 세워 주었다. 오 여사님은 이런 남편이 너무도 고마웠다. 하지만 남편의 성격은 너무도 독선적이고 독불장군 이였다. 아이 다섯을 키우면서도 한 번도 자신의 뜻에 따라 자식들 진로를 결정 할 수 없었다. 아이들 뜻에 따른 것도 아니었다. 무조건 남편의 결정에 따라야 했다. “큰 아들놈은 검사 만들고 둘째 아들놈은 의사를 만들어야겠어! 기집 애들은 어차피 출가 외인이 될 것이니 대학공부 시키는 게 아깝지만 시집들은 잘 가야하니 셋 다 학교선생을 만들면 되겠어!” 남편의 이 결정에 따라 5남매는 그대로 될 수밖에 없었다. 


‘뜻대로 안되는 게 자식이다!’했는데 신통하게도 남편은 자신의 의지대로 큰아들은 사법고시 공부시켜 뜻대로 검사를 만들었으며 죽어도 의사는 되기 싫다는 작은아들을 몇 날 며칠을 두들겨 패서 결국 의대에 진학시켰고 의사를 만들었다. 딸아이들은 작은 오빠가 치룬 전쟁의 결과를 뻔히 보았으므로 감히 어쩌지 못하고 아비의 뜻에 모두 순종하여 사대에 진학하여 모두 교사가 되었다. 남편이 한번 결심해서 안되는 게 없었다. 오 여사님은 매사 모든 결정을 남편이하는 데로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했다가는 그날 집안은 바로 지옥이 되었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는 기미가 보이거나 자신이 생각하기에 불손하다고 느끼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심하면 폭행도 행사했다. 이러다보니 가정은 늘 살얼음판을 건너가는 듯이 조용하고 숨 막히는 긴장이 흘렀다. 


남편이 기분이 좋으면 집안이 다소 활기를 띄지만 조금만 불편한 기색이 보이면 폭풍전야처럼 긴장해야 했다. 이런 폭군 아버지 밑에서도 다행히도 자식들은 삐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주어 오 여사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큰딸이 재미교포와 결혼을 하여 미국에 건너와 살게 되었고 오 여사님 내외분도 가끔 방문차 LA에 들리곤 하다 남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 여사님 에게는 의논 한마디 없이 한국에 있는 재산을 정리하여 미국에 이민 오기로 결정하여 오 여사님은 속절없이 남편을 따라와 미국에 살게 되었다. 남편의 독단적 결정 이였다. 


상가를 구입하거나 집을 살때도 오 여사님에게 의논 한마디 없었다. “니까짓게 뭘 알아?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됐지!” 하는 식이였다. 큰딸 집 근처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 오 여사님 내외는 가끔 손주들 봐주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남편은 세받으러 다니거나 건물 여기저기 손볼게 생길 때마다 기술자 불러 일시키는 것 외에는 거의 집안에 머물렀다. 아침. 점심. 저녁 세끼를 꼭 집에서 먹었는데 매 식사 때마다 밥을 새로 지어야지 해 놓았던 밥을 덥혀 내놓으면 밥상이 날라 갔다. 매끼니 마다 새로 반찬도 한 두 가지 만들어 대접해야지 소홀했다가는 난리가 났다. 오 여사님은 평생 혼자 여행 한번 못해보았다. 미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편 지론이 “여자하고 그릇은 밖으로 내돌리는 게 아녀! 밖으로 내 돌리면 꼭 깨지게 되어있어!”였다. “이제 늙어 할머니가 된 자기 마누라 누가 훔쳐 간다고 그 극성인지 모르겠어요!” 필자를 찾은 오 여사님이 혀를 차며 한 말이다. 이렇게 숨도 못 쉬고 남편 기에 눌려 살던 오 여사님 가정에 급기야 급변사태가 닥쳤다. 사연은 이렇다. 큰딸 내외가 오랜만에 집을 방문하여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반찬으로 내놓은 가지 무침이 사단 이었다. “가지 무침이 왜 이렇게 짜! 갖다 버리고 새로 해와!” 남편이 오여사님을 닦달했다. “왜요?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짠 것 같지 않은데 그냥 오늘만 드시구려!” 이 소리에 남편은 가지무침 그릇을 집어 벽에 던져 버리면서 “이 여편네가 뭔 말이 많아! 다시 해오라면 다시 해와!” 눈물이 쏙 빠지도록 분했다 한다. 사위 앞에서 그 창피를 당하니 평생 받아온 모멸감이 밀려 왔다. 더 이상 인간대접 못 받으며 살 수 없다는 결심을 하신 오 여사님은 필자를 찾아 결심을 토로하신다. 


“정말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제가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니 너무 바보처럼 평생을 살았습니다. 나도 이제 내 인생을 찾고 싶어요! 다 늙어서 무슨 이혼이냐고 하시겠지만 얼마 안남은 인생이니까 소중하지요! 아까운 남은 인생 지금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독한 결심을 하신 오 여사님은 변호사를 사서 재산분할 청구를 하고 이혼절차에 들어갔다. “지가 평생 먼 돈을 벌었다고 나보고 돈을 달래요? 이 여편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요!” 필자를 찾아와 방방 뛰며 화를 내는 남편 분을 보고 필자 왈 “그러기에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요!” 라고 하니 이양반 필자를 노려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결국 오

여사님은 자신의 뜻대로 이혼에 성공하셨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남편이 그제야 생전 처음 사과도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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