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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여행

성 가족 성당(가우디의 발자취를 찿아서 – 2)

2018.03.02

가우디의 발자취를 찿아서-2


 성가족 성당
 Sagrada Família



성가족 성당은 1866년에 처음 계획된 건축물이다.
공사를 시작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앞으로도 100년은 더 걸려야 완성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1882년, 설계를 부탁받은 건축가는 프란시스코 빌랴르(Francisco de Paula del Villar y Lozano).
하지만, 빌랴르는 건축기술고문이었던 마르토렐과의 마찰로 1년만에 작업을 포기한다.
후임자로 선택된 건축가가 바로 안토니 가우디, 1883년 말의 일이다.
가우디는 빌랴르가 설계한 디자인을 폐기하고 세 개의 입구와 12개의 탑이 있는 성당을 새로 설계했다.
이때부터 43년간 가우디는 성가족 성당 공사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붇는다.




성가족 성당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이하고 웅대한 건축물이다


가우디는 1852년 6월25일 바르셀로나의 남쪽 레우스(Reus)라는 도시에서 다섯 남매중 막내로 태어났다.
레우스는 지중해를 끼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인데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구리 세공업자였다.
류마티즘, 관절염으로 늘 몸이 허약했던 가우디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뛰놀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근처의 숲과 바다를 거닐며 자연을 벗삼아 홀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당시 레우스에는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등 여러 양식으로 건축된 성당들이 많았다.
인근에는 타라고나(Tarragona) 유적지와 북쪽으로는 몬세랏산(Montserrat, 4054 피트)이 있었다.
몬세랏산은 카탈루냐의 성지로, 하늘로 치솟은 수많은 봉우리와 바위, 나무 등이 많이 있는 곳이다.
그는 자라면서 늘상 보아온 주변의 풍경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가우디는 몬세랏산에서 영감을 얻어
성 가족 성당을 설계했다(몬세랏산과 수도원)


대장간을 운영하는 삼촌으로부터는 철을 다루는 방법과 주조술, 석고 뜨는 법도 배웠다.
목공과 유리공예, 조각, 장식 제조술 등은 전문 장인들을 통해 기술을 익혔다.
1869년 바르셀로나의 건축학교(예비 과정)에 들어 가게 된 가우디는 부모의 곁을 떠나게 된다.
이미 형 프란시스코가 바르셀로나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그에게 두려움은 없었다.
5년후에는 건축학교에 정식으로 입학하고 열성적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나 건축학교 교장이었던 로젠의 미움때문에 하마터면 졸업장을 받지 못할 뻔 했다.
한 교수의 중재로 투표를 통해 간신히 졸업장을 받는 가우디를 향해 로젠은 이렇게 비꼬았다.
“제군들, 내가 오늘 이 졸업장을 천재에게 주는 것인지 아니면 바보에게 주는 것인지 모르겠네”.
이에 가우디는 “이제 제가 진짜 건축가라는 걸 보여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라고 그의 말을 일축했다.




실제의 사람을 모델로 제작한 탄생의 파사드 세부


아슬아슬하게 건축학교를 졸업한 가우디는 파리 세계 박람회에서 에우세비오 구엘을 만나게 된다.
백만장자였던 구엘(Eusebi Guell)은 한 눈에 천재건축가를 알아보고 그의 평생 후원자가 됐다.
그 후에 만든 건축물이 Güell Pavellons, Palau Güell, Park Güell 이다.
성가족 성당은 겉으로만 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이하고 웅대한 건축물이다.
건축양식은 입체기하학에 기초를 둔 네오고딕 양식이다.
구조는 크게 3개의 파사드(Façade) 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우디는 예수님의 탄생과 수난, 영광을 파사드 정면 장식에 세우기를 원했다.
현재까지 작업 진행중이거나 완성된 파사드는 탄생과 수난의 파사드. 3개의 파사드에는
각각 4개의 첨탑이 세워져 모두 합하면 12개의 첨탑이 세워지는 것이다.




첨탑은 아래에서 한참 올려다 봐야 한다


성당의 조각은 실제의 동물이나 사람을 모델로 제작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정교하게 깍은 조각품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안으로 들어 가니 숲 속에 온 것 처럼 기둥 하나하나가 모두 나무의 형상을 띄고 있다.
청색, 녹색, 주홍색으로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 오는 빛은 환상적이다.
천장 위로는 무수한 별이 반짝이듯 천정등이 빛을 발하고,
돔 중앙의 구멍에서는 태양이 작렬하듯 밝은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돔 아래로는 금색의 캐누피와 등불, 못에 박힌 십자가 상의 예수님이 보인다.




나무 형상의 기둥과 천장 성가족 성당의 내부와 스테인드 글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에 오르니 바르셀로나 시내를 360도 각도로 모두 볼 수 있었다.
가우디는 성가족 성당을 건축하며 마음이 흐트러지면 15일 이상 금식하며 마음을 비우기도 했다.
1911년 부터는 다른 건축에는 신경쓰지 않고 오직 성당 건축에만 매진하기 시작했으며,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전부터는 작업실을 성당 지하실로 옮기고 인부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성당 꼭대기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1926년 6월 7일 저녁, 가우디는 평소처럼 산책에 나섰다가 전차에 치였다.
그 것을 본 택시운전사가 다가왔지만 그는 가우디의 남루한 행색을 보고 그대로 떠나고 말았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택시운전사도 마찬가지였다.
가우디는 고통 속에 오랜 시간을 길거리에 방치되어야 했다.
뒤늦게 빈곤층 병원으로 옮겨진 그를 성당 관계자들이 찾아와
좋은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가우디는 거절한다.
자신도 빈곤층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성가족 성당 지하에 있는 가우디의 무덤


가우디는 이틀 뒤 성체 세례를 받은 후 운명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다.
성가족 성당에서는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의 레퀴엠이 엄숙하게 울려퍼졌으며
경찰, 사제, 건축가, 건축학교 학생, 교회 기술자, 시민등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행렬을 따랐다.




가우디의 잠들어 있는 모습과 장례행렬


가우디의 전재산은 유언대로 성가족 성당에 기부됐고
관은 교황의 허가를 받아 성당 지하 납골당(Crypta)에 영원히 안장됐다.
고통과 가난을 동반해야, 진정한 예술품이 나온다고 생각했던 안토니 가우디.
그는 겸손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요 위대한 건축가였다.


여행팁: 오픈시간: 오전 9시 ~ 6시(4월 부터 9월은 오후 8시)
관광객이 많아 오픈시간 30분 전에 줄 서 있는 것이 현명하다.
입장료: 일반: 15유로(오디오 가이드 포함: 22유로, + 옥상: 29유로) 영어 가이드 투어: 24유로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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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족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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