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독일의 참회 ![]() ![]() 13세기 초에 처음 등장한 도시 베를린은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지명된다.
![]() 후에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면서 독일제국의 수도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개전과 패전, 히틀러의 집권과 몰락을 목격하기도 했다.
![]() 1945년 나치 독일이 항복하자, 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군대가 분활 통치하게 된다.
![]() ![]()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후, 다시 통일이 이루어 지기 까지는 45년의 세월이 걸렸다.
![]() 그동안, 동독과 서독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는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 였다.
![]() 체크포인트 찰리는 한국의 판문점 같은 검문소로 베를린 시내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 냉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소련과 미국의 탱크가 대치했던 매우 위험하고 중요한 구역이다.
![]() 이곳에서는 동독에서 서독으로 넘어 오려는 동독인들의 수많은 탈출시도가 있었다.
![]()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62년에 있었던 페터 페흐터(Peter Fechter) 사건이다.
![]() ![]() 분단의 아픔은 깊었지만, 독일교회에서 기도하는 모임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다.
![]() 라이프치히(니콜라이 교회)에서는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가 이끄는 ‘월요평화기도회’가 탄생했다.
![]() *간절한 기도의 응답인가? 1989년 11월 9일 드디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 체크포인트 찰리는 1990년 10월 3일, 독일의 통일이 선포되며 공식적으로 문을 닫는다.
![]() 현재는 남아 있는 검문소 부스와, 바로 옆으로 개인 박물관인 장벽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에는 동독 탈출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었던 사람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실제 사용했던 장비들과 함께 전시실에 잘 전시돼 있다.
![]() ![]() ![]() ![]() 그러나 이름만 Kim Jung Eun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이 그림은 영락없는 김정은의 얼굴이다.
![]() 미국 유명 검색 사이트인 어바웃닷컴은 김정은을 “2013년 아시아 최악의 독재자”로 선정했다. ![]() 왼쪽으로 조금 올라 가니 ‘테러의 토포그래피 박물관(Topography des Terror)이 나온다.
![]() 테러의 토포그래피 박물관은 베를린의 현대사(나치 집권, 전쟁, 분단, 통일 등)에 대한 자료들이,
![]() 사진과 충실한 설명을 곁들여 공개해 놓은 훌륭한 박물관이다.
![]() ![]() ![]() 나치 친위대(SS Men)와 보안 경찰(Sicherheitspolizei)의 지원(Aid)을 호소하는 포스터..
![]() 단체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 하는 나치 친위대(SS Men)와 여자 보조원(SS-Maids)들..
![]() 노이엔감메 강제수용소(Neuengamme Concentration Camp)의 크리스마스 파티..
![]()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Belgrade) 근처에서 확인사살을 하고 있는 나치 지휘관..
![]() 연합군에 붙잡힌 독일의 무장친위대(Waffen SS)의 모습(1945년 5월)..
![]() 영국군에 붙잡힌 여자 나치 친위대의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