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단테는 아직 잠들지 않았다(라벤나-4)

2018.08.20





 
 


Tomba di Dante

단테의 묘지 
 
라벤나-4



라벤나는 황금빛 찬란한 모자이크로 유명한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또 한군데 반드시 방문해야할 특별한 곳이 있다.




바로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묘지다.
원래 그의 이름은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였다.
후세 사람들이 간단하게 단테로 부르는 것이다.




묘지 앞으로 가니 자물통이 굳게 잠겨있었다.
주위에는 우리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오후 7시.
내부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위대한 시인의 묘지는 생각보다 초라해 보인다.




다음날, 묘지 옆에 위치한 단테 박물관을 먼저 찾았다.




박물관은 옛 프란치스코 수도원 회랑에 자리 잡고 있다.




개관일은 1921년 9월 11일, 단테의 사망 600주년을 추모하여 만든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당시 교육감이었던 ‘암브로지오 안노니’와 '코라도 리치'에 의해 추진되고 개관됐다.




리치는 ‘아동의 미술’을 저술한 교육가로 평생을 단테 연구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내부에는 단테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단테는 1265년 6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단테의 아버지는 몰락한 귀족, ‘알리기에로 디 벨린치오네’이고 어머니는 ‘벨라 아바티’였다.




그는 9살 때 베아트리체(당시 8세)라는 아릿따운 소녀를 보고 평생 그녀를 사모하게 된다.
18살 되던 해에는 산타 트리니타 다리 앞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단테의 심장은 고동쳤고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된다.




이런 사실을 알 수 없는 베아트리체는 바르디라는 은행가와 결혼했다.
그리고는 1290년,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픔에 잠긴 단테는 그녀에게 바치는 연시, 신생(La Vita Nuova, 1294)을 저술한다.
‘바로 그 순간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 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역동적인 감정이 솟구쳐 올랐으니
내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고 그 떨림 때문에 내 맥박은 잦아들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발견하고 가슴 뛰던 그 날을 상기하며 신생 2장에서 쓴 글이다.




베아트리체가 죽자 단테는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300년에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6명의 최고위원에 선출되기 까지 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정치, 외교, 행정, 군사 등의 활동을 한 인생 최고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수많은 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반대파인 흑당이 세력을 잡자 단테는 정치적 반역자로 기소되어 공직추방 판결을 받게 된다.
흑당은 단테에게 법정 출두를 요구했지만 그는 출두하지 않았다.




법정은 단테에게 피렌체 영구추방과 함께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가혹한 조처를 취했다.



베로나 시뇨리 광장에 세워져 있는 단테의 동상

그리고 그는 거의 20년 동안의 세월을 피사, 루카, 볼로냐, 로마, 베로나 등의 도시들을 전전하게 된다.
1307-1309년 사이에는 프랑스 파리도 방문했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확인 된 것은 없다.




흑당은 1315년, 단테에게 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면 사면과 귀환을 허락하겠다고 제의한다.




이에 단테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어디에 있건 태양과 별 빛을 바라볼 수 있기에 치욕적으로 국민과
조국 앞에 서지 않고도 언제나 고귀한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




결국, 단테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피렌체로 돌아 가지 못하고 1321년 9월 라벤나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라벤나의 통치자였던 ‘귀도 노벨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월계수 화관을 단테의 영전에 바쳤다.




이때부터 월계수 화관은 단테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석관 위에도 화관을 쓴 단테는 깊은 명상에 잠겨있다.




묘지 옆 정원에는 거의 2년동안 그의 유골이 안치돼 있던 담쟁이넝쿨 무덤이 있다.




석판에는 1944년 3월 23일 부터 1945년 12월 19일까지 단테의 유골이 묻혀 있었다고 쓰여 있다.




이곳 외에도 그의 유골은 수도사들에 의해 수도원 담벼락 등 은밀한 장소에 숨겨지기도 했다.




이것은 단테의 유골을 피렌체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라벤나 사람들의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피렌체는 그동안 단테의 유골은 고향으로 돌아 와야 한다며 라벤나 시에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으며
유골이 돌아 올 것을 대비 1829년에는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단테의 가묘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1865년에는 라벤나 출신의 엔리코 파찌(Enrico Pazzi)가 단테의 동상을 조각하여 피렌체 시에 기증했다.




1865년은 단테가 세상에 태어난지 600주년 되던 해였다.




조각상은 산타 크로체 광장 중앙에 세웠지만 1966년 홍수로 현재는 산타 크로체 성당 앞으로 옮겨 세웠다.




피렌체 시는 2008년, 단테가 세상을 떠난지 700년이 넘어서야 그에게 내렸던 사형 선고를 철회한다.




이곳을 방문하고 느낀 것은 단테의 유골은 피렌체로 보내 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단테는 한 도시의 단테가 아니라 전세계인이 사랑하는 단테이기 때문이다.
피렌체는 라벤나 시에 단테의 유골을 돌려 달라고 간곡하게 요구해야 한다.
라벤나도 이제는 위대한 시인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야 할 것이다.
시인은 결코 잠들지 않았다.


글, 사진: 곽노은




  Dante Alighieri
 

1265 년 6월(피렌체) - 1321년 9월(라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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