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mba di Dante 단테의 묘지 ![]() 라벤나는 황금빛 찬란한 모자이크로 유명한 도시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또 한군데 반드시 방문해야할 특별한 곳이 있다. ![]() 바로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묘지다. 원래 그의 이름은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였다. 후세 사람들이 간단하게 단테로 부르는 것이다. ![]() 묘지 앞으로 가니 자물통이 굳게 잠겨있었다. 주위에는 우리 두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오후 7시. 내부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위대한 시인의 묘지는 생각보다 초라해 보인다. ![]() 다음날, 묘지 옆에 위치한 단테 박물관을 먼저 찾았다. ![]() 박물관은 옛 프란치스코 수도원 회랑에 자리 잡고 있다. ![]() 개관일은 1921년 9월 11일, 단테의 사망 600주년을 추모하여 만든 박물관이다. ![]() 박물관은 당시 교육감이었던 ‘암브로지오 안노니’와 '코라도 리치'에 의해 추진되고 개관됐다. ![]() 리치는 ‘아동의 미술’을 저술한 교육가로 평생을 단테 연구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 내부에는 단테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 단테는 1265년 6월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단테의 아버지는 몰락한 귀족, ‘알리기에로 디 벨린치오네’이고 어머니는 ‘벨라 아바티’였다. ![]() 그는 9살 때 베아트리체(당시 8세)라는 아릿따운 소녀를 보고 평생 그녀를 사모하게 된다. 18살 되던 해에는 산타 트리니타 다리 앞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단테의 심장은 고동쳤고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된다. ![]() 이런 사실을 알 수 없는 베아트리체는 바르디라는 은행가와 결혼했다. 그리고는 1290년, 24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슬픔에 잠긴 단테는 그녀에게 바치는 연시, 신생(La Vita Nuova, 1294)을 저술한다. ‘바로 그 순간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 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역동적인 감정이 솟구쳐 올랐으니 내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고 그 떨림 때문에 내 맥박은 잦아들었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발견하고 가슴 뛰던 그 날을 상기하며 신생 2장에서 쓴 글이다. ![]() 베아트리체가 죽자 단테는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300년에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6명의 최고위원에 선출되기 까지 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있어서 정치, 외교, 행정, 군사 등의 활동을 한 인생 최고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수많은 적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 반대파인 흑당이 세력을 잡자 단테는 정치적 반역자로 기소되어 공직추방 판결을 받게 된다. 흑당은 단테에게 법정 출두를 요구했지만 그는 출두하지 않았다. ![]() 법정은 단테에게 피렌체 영구추방과 함께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가혹한 조처를 취했다. ![]() 베로나 시뇨리 광장에 세워져 있는 단테의 동상 그리고 그는 거의 20년 동안의 세월을 피사, 루카, 볼로냐, 로마, 베로나 등의 도시들을 전전하게 된다. 1307-1309년 사이에는 프랑스 파리도 방문했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확인 된 것은 없다. ![]() 흑당은 1315년, 단테에게 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면 사면과 귀환을 허락하겠다고 제의한다. ![]() 이에 단테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어디에 있건 태양과 별 빛을 바라볼 수 있기에 치욕적으로 국민과 조국 앞에 서지 않고도 언제나 고귀한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 ![]() 결국, 단테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피렌체로 돌아 가지 못하고 1321년 9월 라벤나에서 숨을 거두었다. ![]() 당시 라벤나의 통치자였던 ‘귀도 노벨로’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월계수 화관을 단테의 영전에 바쳤다. ![]() 이때부터 월계수 화관은 단테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석관 위에도 화관을 쓴 단테는 깊은 명상에 잠겨있다. ![]() 묘지 옆 정원에는 거의 2년동안 그의 유골이 안치돼 있던 담쟁이넝쿨 무덤이 있다. ![]() 석판에는 1944년 3월 23일 부터 1945년 12월 19일까지 단테의 유골이 묻혀 있었다고 쓰여 있다. ![]() 이곳 외에도 그의 유골은 수도사들에 의해 수도원 담벼락 등 은밀한 장소에 숨겨지기도 했다. ![]() 이것은 단테의 유골을 피렌체로 빼앗기지 않으려는 라벤나 사람들의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 피렌체는 그동안 단테의 유골은 고향으로 돌아 와야 한다며 라벤나 시에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었으며 유골이 돌아 올 것을 대비 1829년에는 산타 크로체 성당 안에 단테의 가묘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 1865년에는 라벤나 출신의 엔리코 파찌(Enrico Pazzi)가 단테의 동상을 조각하여 피렌체 시에 기증했다. ![]() 1865년은 단테가 세상에 태어난지 600주년 되던 해였다. ![]() 조각상은 산타 크로체 광장 중앙에 세웠지만 1966년 홍수로 현재는 산타 크로체 성당 앞으로 옮겨 세웠다. ![]() 피렌체 시는 2008년, 단테가 세상을 떠난지 700년이 넘어서야 그에게 내렸던 사형 선고를 철회한다. ![]() 이곳을 방문하고 느낀 것은 단테의 유골은 피렌체로 보내 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단테는 한 도시의 단테가 아니라 전세계인이 사랑하는 단테이기 때문이다. 피렌체는 라벤나 시에 단테의 유골을 돌려 달라고 간곡하게 요구해야 한다. 라벤나도 이제는 위대한 시인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야 할 것이다. 시인은 결코 잠들지 않았다. 글, 사진: 곽노은 Dante Alighieri ![]() 1265 년 6월(피렌체) - 1321년 9월(라벤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