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고대 로마의 최대 원형경기장(콜로세움)

2018.08.24





고대 로마의 최대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Colosseo 



 

로마는 위대한 도시다.




바티칸, 포로 로마노, 개선문, 카라칼라 욕장, 마르첼로 극장, 성벽, 판테온 등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 많고
로마 국립 박물관, 퀴리날레 궁전,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 등 볼 것이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로마에는 세계의 불가사의로 불리는 건축물 콜로세움(Colosseo)까지 있다.
콜로세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건축을 시작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가 완공한 건축물이다.
당시 그들이 부르는 콜로세움의 이름은 프라비우스 원형극장(Flavian Amphitheater)이었다.
프라비우스는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 티투스 등 왕조를 나타내는 말이다.




서기 69년, 황금궁전을 건축하고 가혹한 세금정책을 펼쳤던 네로는 끝내 권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당시 30세의 네로는 처형대신 자살을 선택한다.
이후,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황제가 되었지만 모두 몇 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살해 당하거나 자살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제국 사상 처음으로 황족이 아닌 평민(기사계급)으로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두 아들과 함께 네로의 황금궁전이 있던 자리에
로마 시민들을 위한 거대한 경기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전쟁, 화재 등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시민들에게 콜로세움 건설은 획기적이고 역사적이며 모험적인 일이
었다.




경기장 건설은 서기 70년부터 시작했다.




*다행히 큰아들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도시를 함락시켰다.




*예루살렘의 수많던 보물들은 전리품이 되어 모두 로마로 가는 수레에 실리게 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전리품 수레의 길이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3 1/2 밀리언 큐빅 피트의 돌을 필요로 했다.
돌을 깨고 나르기 위한 수많은 노예들도 필요했다.
유대, 모이시아, 발칸, 아프리카 등에서 노예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힘있는 노예들은 팔리거나 채석장으로 끌려 갔으며 건축기술이 있는 노예들은 경기장으로 끌려 갔다.
노예들 중에는 모이시아 출신의 베루스(Verus)라는 청년도 있었다.
채석장의 노예들은 하루종일 돌을 깨고 무거운 돌을 날라야만 했기에 힘들고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날 몇 명의 남자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그들은 글래디에이터 학교의 주인과 결투사들로 힘 센 결투사를 고르기 위한 방문이었다.
하지만 체격이 큰 두 명의 결투사를 고른 그들은 다른 노예들은 쳐다 보지도 않고 떠나려 했다.




이때 베루스가 프리스커스(Priscus)라는 동료에게 주먹을 날린다.
그러자 두 사람은 격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싸움이 절정에 이르게 되자 주인인 ‘라니스타스’는 싸움을 중지시키고 두 사람을 마차에 태웠다.
그들도 이제 결투사가 되는 학교로 가게 된 것이다.




이틀 후 그들은 로마에 도착했다.
라니스타스는 검투사들을 사고 파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검투사들은 죄인이나 노예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스릴을 즐기며 돈벌기 위해 검투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시민들에게 검투사들은 영웅이었고 그들이 흘린 땀은 고가에 매매되는 향수가 되기도 했다.
여인들은 돈을 주고 검투사와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에는 그들의 죽음을 볼 때도 있었다.
베루스와 프리스커스는 학교에서 최고의 검투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열심히 받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경기장이 완성되는 것을 보고자 했지만 서기 79년 6월 23일(69세) 세상을 떠나고 만다.
콜로세움의 완공이 거의 다 된 시점이었다.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사람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 티투스(Titus)였다.




그러나 티투스 황제는 폼페이 폭발(79년 8월 )에 이어 로마의 화재(80년)까지 나는 재앙을 겪어야만 했다.
티투스의 정치활동은 끝나는 듯 했으며 그는 정적들에 의해 살해되는 악몽을 꾸기까지 했다.
그의 입에서 ‘나는 이제 끝장이구나’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마지막 남은 한가지 희망이 있었다.
로마 화재에도 끄떡없이 서있는 프라비우스 원형극장(콜로세움)이 있었다.
그는 로마 시민들을 향해 공표한다.
“100일동안 원형극장 오픈 기념 경기를 개최한다. 입장은 모두 무료다!”




*서기 79년 여름, 로마로 실려 오는 수많은 마차행렬에는 짐승들의 포효 소리가 요란했다.
그 것은 사자, 호랑이, 표범 등 사나운 짐승들의 울부짖음이었다.
당시 동물사육사는 콜로세움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짐승들이 검투사에게 달려 들게 하여 검투사들을 물어 뜯게 해야 했다.




거대한 경기장은 3개의 각 층마다 80개의 아치로 이어지며 견고하게 건축됐다.
아치는 무거운 하중을 지탱하는 구조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발명이었다.
건물의 견고함은 접합물질이 결정한다.
당시에는 회반죽이 있을 뿐 다른 접합 물질은 없었는데 로마인들은 또 한가지 놀라운 발견을 한다.




바로 화산재를 이용해 시멘트를 만든 것이다.
화산재는 폼페이 인근지역에 가면 쉽게 가져올 수 있었다.
76개의 출입구가 있는 경기장에는 5만 5천명의 관중들이 입장할 수 있었다.




경기장 아래에서는 수 백명의 검투사와 죄수들이 운동장으로 끌려 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어두운 지하세계는 서로 죽여야 할 운명에 놓인 존재들이 함께 숨 죽이며 경기를 기다리던 곳이었다.
그들은 이곳 바닥에서 함께 머물러 있다가 승강장치를 이용해 경기장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당시 콜로세움에는 적어도 28개의 승강장치가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수많은 노예들은 밧줄에 묶여있는 캐스터를 돌려 승강장치의 동력을 만들어 냈다.
경기가 있는 날에는 승강기를 움직여 각종 무대장치와 맹수들을 경기장으로 들어 올렸다.




*드디어 죄수들이 끌려 나오고 로마 병정들이 들어 가자 수 십 마리의 사자들이 풀려 나왔다.
그러나 관중의 함성 소리에 겁먹은 사자들은 죄수들에게 다가 가지를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황제는 동물사육 책임자를 불러 사형시킨다.




오후가 되자 검투사들의 경기가 시작됐다.
검투사들은 투구를 쓰지 않았다. 황제가 피를 원했기 때문이다.
검투사들은 살기 위해 싸우고 상대방을 죽여야만 했다.
티투스의 엄지는 계속해서 밑으로 내려만 갔다.




*하이라이트는 로마의 최고 검투사인 베루스와 프리시우스의 대결이었다.
관중들은 열광했고 두 검투사는 결투를 시작했다.




결투를 지켜본 풍자시인 마르티알리스(Martialis)의 기록에 의하면
계속해서 비기는 결투가 계속되자 황제는 방패없는 결투를 하라고 명령한다.
싸움 도중 프리시우스가 칼을 놓치게 되자 베루스는 관중들을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이때 프리시우스의 주먹이 베루스의 얼굴로 날아왔다.
이때서부터 주먹 싸움이 시작됐는데 이것은 채석장에서의 격투 연장전의 마지막 라운드였다.
그러자 결투는 관중들의 더욱 더 큰 흥미를 끌게 됐다.




함성은 더욱 커졌고 두 사람의 주먹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두 결투사의 싸움은 원형경기장 오픈 기념 경기의 최고 하일라이트였다.
싸움이 절정에 이르자 황제는 격투를 중지시키고 관중들을 돌아 본 후 양 손 엄지를 들어 올렸다.




두 사람 모두에게 승리를 선언한 것이다.
황제는 황금나무 칼과 월계수를 하사하고 두 사람은 자유인의 신분을 얻게 됐다.
이 결투는 콜로세움에서 벌인 검투사 기록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로마인들은 프라비우스 원형극장을 콜로세오(Colosseo)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영어로는 콜로세움이라고 부른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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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의 이미지(6장)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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