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隨筆]
簡易 崔岦의 파란만장한 생애탐구를 통해 내가 얻은 교훈 1
한 인간의 생애에 대한 정당하고 공정한 평가는 단지 그 사람이 살았던 때를 중심으로만 그대로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문헌들을 통해 객관적인 사실들이 상호 교차검증되어 그 때의 時代精神 (Zeitgeist, 영어: Spirit of the Age 또는 Spirit of the Time)을 기반으로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균형있고 객관적인 평가가 끊임없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2010년 무렵부터 10여년간 가히 ‘朝鮮의 르네상스맨”이라고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는 簡易 崔岦 (최립: : 1539-1612)에 대한 개인적 연구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최립은 ‘稀代의 天才’라고 불리웠다고 하는데, 사람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대립적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우선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또다른 이유는 최립 가문의 미천함을 들면서 그를 무시하다가 조선이 겪은 壬辰倭亂과 같은 絶體絶命의 국가적 위기에서 다급할 때마다 왜 그를 급히 조정으로 불러 들였는가 하는 이율배반적인 국가의 태도도 있었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고 단지 내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10여년간 틈틈이 시간이 있을 때마 다 조금씩 관심을 가지고 관련 자료를 읽어보곤 하였다. 그나마 천만 다행인 것은 이제는 많은 자료가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인이 읽어보고자 하는 자료를 접근하기가 전보다는 훨씬 쉬어졌다는 것이다.
조선의 문인, 정치가며 외교관이었던 최립의 생애에 대해 내가 순수하게 문헌들을 읽고서 느꼈던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얻은 내 나름대로의 교훈들을 여기에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최립은 선조대에는 조선의 8문장가로 이이,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윤탁연, 송익필, 이순인과 함께 꼽혔으며, 조선과 명나라에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뛰어난 시재와 고문을 본뜬 의고문체로 유명하였으며 글씨는 송설체를 아주 잘 썼다고 한다. 만년에는 중국의 구양수의 글을 존경하여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하며, 초기에는 반고와 한유의 글을 좋아하여 본받으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는 학문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策問(책문)
就爲學上言之(취위학상언지)
其目有四(기목유사)
曰存養也(왈존양야)
省察也(성찰야)
致知也(치지야)
力行也(역행야).
묻노라!
학문하는 방법론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그 항목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 본마음을 잃지 않도록 착한 성품을 기르고,
둘째, 마음속으로 깊이 반성하여 자신을 돌이켜 살피고,
셋째, 사물의 도리를 깨달아서 알도록 노력하며,
넷째, 이 모든 것들을 힘써 행할지니라.
그가 얼마나 글을 쓰는데 각고의 노력과 엄밀한 구상을 하는지는 진주목사 로 재임한 6년동안 그가 다음의 단 한편의 시만 작시했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窓間懸一虱
三歲車輪大
我有一拳石
不向華山坐
창틈에 이 한마리 달아 놓고,
세살 때 보니 수레바퀴 같았다.
나에게 주먹만한 돌이 있으니,
화산(華山)에 앉아 있는것 같다.
그는 그의 글을 결코 허투루 쓰지 않았던 것이다.
간이 최립의 파란만장한 생애탐구를 통해 내가 얻은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