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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천년 후를 예언한 제갈량

2020.08.04


 

                천년 후를 예언한 제갈량 



 위, 촉, 오 중국 삼국시대에 지략가로서 이름을 날린 촉의 제갈공명은 유비를 도와 맹활약을 한 지략가로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통해 제갈공명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이다. 제갈량은 易의 大家(역학의 대가)로서 ‘제갈신수’라고 하는 易의 기법을 연구, 창안하여 저서로 남기기까지 하였다. 처음부터 제갈공명은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서 유비를 돕는다하여도 촉이 삼국을 통일할 수는 없고 결국 조조가 경영하는 위나라가 조조의 자식대에 이르러 삼국을 통일할 것이며 오의 손권이나 촉의 유비, 위의 조조 어떤 인물도 이 시대를 보지 못하고(자신을 포함)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 나서지 않고 고향에 묻혀 살며 손수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공부를 하는 안빈낙도의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 유비의 삼고초려의 정성에 감동하여 드디어 세상에 출정하게 된다. 이때 분명히 공명은 유비에게 천하삼분의 계(天下參分의 計)를 이야기했다. 즉 자신이 아무리 주군(유비)을 도와 힘을 쓴다 해도 결국 천하통일은 이룰 수 없으며 단지 천하를 3분하여 그 중 하나가 될 수는 있다는 계략을 세운 것이다. 어차피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심산이였고, 결국 자신은 위를 공략하다 오장원 전투에서 죽고 말 것이며, 자신의 부하장수인 위연이 이 틈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보고 이에대한 대비책까지 다 세워놓고 세상을 떠난 제갈공명이다. 


자신이 죽은 것을 알면 위나라의 천재책략가인 사마중달이 이리저리 계책을 쓸 것임을 알고 자신과 똑같이 생긴 목각인형을 사륜거에 태우고 나타나게 하여 이를 보고 기습에 나섰던 사마중달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십여리나 똥줄이 빠지게 도망가게 만들어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라는 말이 생기게 했다. 이처럼 천문, 지리, 병법에 능통하였고 위대한 예언가였으며 충신이자 뛰어난 문장가(이렇게 쓰다 보니 민족의 영웅 어쩌고저쩌고 끝없는 찬사를 붙인 북한의 어투같아 그만 줄인다)였던 그는 자신의 사후 천년 후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바있다. 


제갈량이 죽고 약 천년이 지난후의 사람인 조참은 송(宋)나라의 대장군이었다. 그는 그 유명한 악비(岳飛)장군과 함께 당대를 주름잡는 명장이자 지략가였다. 그는 자신에 대해 매우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자신의 능력을 주위에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한다. 자신과 어떤 이를 비교하며 자신이 낫다는 것을 떠들며 큰소리치기를 좋아했는데 이 허풍이 심해지다 보니 천년 전 사람인 제갈공명(제갈양)까지도 그 대상이 되었다. 조참은 제갈량에 대해 늘 폄하하는 말을 많이 했는데 자신의 능력 같으면 위나라, 오나라를 다 평정하고 천하통일을 너끈히 이룬 뒤 한실중흥(漢室重興)을 성공 시켰을텐데 제갈공명의 능력이 이에 미치지 못했으니 자신의 능력이 월등 뛰어나다고 자신하곤 했다. 이런 조참이 서촉(西蜀)공략에 나섰을 때 이번 정벌을 성공시키면 평소에 자신이 공명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왜냐하면 서촉은 공명이 살아생전 자신의 웅지를 펴던 본거지였기 때문이었다. 


대군을 이끌고 기세가 등등하여 일거에 서촉을 멸하여 자신의 능력을 보이겠다고 의기양양하였다. 그런데 한 고을을 지나고 있을 때 비각(碑閣)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조참은 마을 지도자인 노인에게 “저 비각이 무엇인데 저리 웅장하고 사람들이 극도의 예를 갖추는 것이요?” 라고 물은 즉 돌아온 답이 “後漢 제갈무후께서 생전에 세워두신 전각이옵니다. 절대로 문을 열지 말고 봉한 채로 두라는 생전의 명령이 있었던지라 문이 봉해진 채로 천년이 지나왔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는 채 지내왔습니다. 다만 이 고을에 흉년이 들거나 병마가 창궐할 때에는 이곳에다 기원을 하곤 했는데 큰 효험이 있어 고을 사람들 남녀노소 모두가 정성을 다해 이곳을 숭배하고 있습니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뜩이나 공명을 깔보던 조참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 여기고 문을 열라 명령했다. 모두가 주저주저하며 눈치를 보고 있자 화가 난 조참이 스스로 비각의 문을 뜯어 제쳤다. 그런데 눈앞에 우뚝 나타난 빗돌에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千歲後知我者其曹參(천년후에 나를 알 사람은 바로 조참이렸다!) 조참은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천년 전에 살았던 이가 천년 후에 자기가 어찌 이곳을 지날 것을 알고 이런 글귀를 남긴단 말인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비석의 뒷면을 보니 비석 뒷면에는 공명히 간곡히 조참에게 부탁하는 글이 새겨있었다. ‘부디 서촉에 입성(入城)하시거든 이인치민(以人治民)하시오. 일천년 앞서서 내가 그대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요’ 조참은 꼬꾸라지듯이 그 자리에 부복하여 “제가 그동안 너무 교만하여 성인을 욕보였습니다. 제발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어찌 무후의 발끝에나 이르겠습니까? 높으신 뜻 반드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조참의 군대는 서촉에 입성하여 공명의 뜻대로 단 한명의 양인도 살상하지 않았다. 


옛날 군대의 관례는 점령지를 점령한 군사들의 약탈을 어느 정도 용인해 주었다. 목숨을 걸고 싸워준데 대해 포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허나 대장군의 추상같은 엄명이 있었던지라 감히 이를 어기는 군사는 없었다. 천년 후를 내다보고 백성의 안위를 걱정한 공명의 경지가 놀랍다 아니할 수 없다. 이렇듯 易의 경지는 한도 끝도 없이 높다. 필자도 옷깃을 여미고 더욱 공부에 정진 해야겠음을 새삼 느끼게 하는 일화였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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