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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돈이 독(毒)이 된 노인

2020.09.03



            돈이 독(毒)이 된 노인


 필자의 오랜 고객이신 강영감님은 주위로부터 ‘왕소금’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는 구두쇠로 소문난 분이다. 경북 영천 산골짜기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배우지 못하고 이른바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냈다. 배고픔 때문에 어려서 일찍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모진 고생을 했다. 중국집 배달부, 구두닦이 공사장 잡부 등을 거치며 오로지 먹고 살아남기에 전전긍긍해야 했다. 이러던 중 우연히 뱀꾼을 만나 따라다니며 뱀일을 배웠다. 깊은 산속 이곳저곳을 떠돌며 뱀도 잡고 부업으로 약초도 캐어 읍내에 내다 팔아 곡식과 바꿔 산속 깊은 움막에서 홀로 살았다. 이렇게 외롭고 어려운 시기를 보내다 인생의 큰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영물 중 영물로 알려진 백사(흰뱀)을 우연히 잡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듣고 먼 길을 애써 달려온 부잣집 마나님을 만나게 된다. 


부산에서 큰 기업체를 운영하던 영감님이 갑자기 쓰러져 세상에서 귀하다는 온갖 약초도 소용없이 반신불수가 되어 사경을 헤메이자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며 영약을 구하던 중 이 소식을 듣고 불문곡직 일행을 이끌고 강씨 뱀꾼 산막에 들이닥친 것이다. 마나님이 내미는 상상하지도 못한 거금과 뱀을 바꾼 뱀꾼 강씨는 그길로 산막을 버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떠나기 전 고향집에 들려 가지고 있던 돈 중 한 묶음의 큰돈을 던지고 왔다. 서울에 와서 제일 먼저 한일은 당시 허허벌판 늪지였던 강남 나루터인근의 습지를 무작정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 습지는 거의 쓸모가 없는 땅이었다. 장마가 지면 농사지은 수확물을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잃곤 해서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농지였기 때문이다. 


애써 농사를 지어도 수확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반반이어서 대부분 버려두거나 짧은 시간 안에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심어보는 수준이다 보니 땅값도 똥값이었다. 어려서부터 소원이 넓은 땅에서 마음껏 농사지어보는 것이었던 땅꾼 강씨는 비록 버려지다시피한 땅이지만 넓은 땅을 원했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장마철을 피해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을 키워 성공해보고 싶은 욕심이 컸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배라고도 할 수 없는 조그만 뗏목을 타고 이곳저곳 경작지를 오갔다. 길이 제대로 닿지 않아 배를 타야만 오갈 수 있는 습지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첫해 소출을 얻을 수 있었다. 습한 땅에는 미나리도 심고 조금 둔덕위에 있어 그나마 덜습한 땅에는 배추나 무, 참외를 심었다. 농사지은 작물의 태반을 잃을 때가 종종 있었지만 내 땅을 가졌다는 뿌듯함에 밤낮을 몰랐다. 


시골에 있는 남동생 둘과 어린 여동생을 불러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살림을 차렸다. 남동생 둘을 새벽부터 들볶아 깨워 밭에 나갔고 어린 여동생에게는 집안 살림을 시켰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살림이 어느 정도 펴기 시작했다. 이웃에 사는 주정꾼 호라비를 구워 삼아 그의 외동딸을 색시로 얻었는데 쌀 2가마니 값의 거금(?)을 주고 데려 올 수 있었다. 이렇게 장가도 들고 농사도 늘려나갔다. 돈이 조금모이면 무조건 이런 척박한 땅을 사는데 썼다. 자식도 주렁주렁 여덟이나 두었다. 


이런 세월이 흐르던 중 강남땅에 개발열풍이 불었고 땅값은 하루가 다르게 미친듯이 뛰어 올랐으나 땅 팔라고 꼬득이는 복덕방들의 꼬임에도 강씨는 늘 ‘소귀에 경읽기’였다. 다만 땅값이 너무 올라 땅사서 늘리는 재미를 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할 뿐이었다. 이런 세월이 흐르다보니 강영감님은 어느덧 상상할 수도 없는 정도의 어마어마한 땅 부자가 되었다. 이렇듯 부자가 되어서도 강영감님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반찬이라고는 간장에 꼬추장, 풋고추가 전부일 정도로 먹는것조차 아끼고 아낄 정도였다. 부자가 되었어도 식구들의 생활수준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차 한잔 술 한잔 마시는게 아까와 사람들조차 만나지 않았다. 


자식들이 참다못해 손이라도 벌리면 버럭 화를 내며 “이놈아! 내 돈이 어떤 돈인데 손을 내미냐? 배고픈것 참고 허리띠 졸라매고 손이 부르트도록 추위 참으며 벌벌 떨며 모은 돈이다. 내 돈을 니가 벌었냐? 먹여주고 재워주며 키워준것만도 고맙게 알아라 이놈!” 이러다보니 재산은 지킬 수 있었지만 자식들과는 모두 의절하고 말았다. 필자가 강영감님을 만나게 된 것은 자식 중 그래도 제일 이뻐하는 막내딸이 이곳 LA 한인타운에 살고 있어서 강영감님이 비행기 값이 아까와 손을 벌벌 떨며 티케팅을 해서 딸집에 와서 머물 때 필자의 칼럼을 보고 상담비가 아까와 몇 번을 망설이다 큰 결단(?)을 내려 필자를 따님의 안내로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따님은 LA허름한 APT에서 이혼한 채 홀로 두 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었다. 원베드룸 아파트에 살며 식당 웨이츄레스로 겨우겨우 생활을 이끌어 가는 막내딸은 몸도 약해 고된 일은 견디지 못하고 툭하면 코피를 쏟았다. 이런 모습을 보는 애비 마음이 무척 아팠을 터인데도 모른체했다. 아주 늦은 나이에 낳은 딸이기에 무척이나 이뻐했으나 결코 경제적 도움은 주지 않았다. 필자는 강영감님과 상담하면서 이 노인분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다. 돈은 말 그대로 돌고 돌아야 가치를 발휘한다. 돈은 잘 살기위해 필요한 것이다. 절약을 하되 필요할 때 돈을 쓸 줄 알아야 돈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특히나 다른 이들을 살리는 일에 기꺼이 쓸 줄 알아야 돈으로 선업을 쌓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강영감님은 돈에 대해 너무 집착을 하여 돈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자식들은 모두 이를 박박 갈며 “저놈의 영감탱이 빨리 죽어버려라!” 라고 기원들을 해댄다. 영감님이 죽어야 유산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평생을 같이한 마나님도 집을 나가 아들집으로 가버렸다. 혼자 빈집에 살며 홀로 라면 끓여먹고 고추장, 된장에 밥 비벼 먹는 궁상을 떠는 영감님은 필자가 보기에 반드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환자였다. 자신이 모은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강영감님은 모든 것을 잃었다. 돈이 복이 아니라 화(禍)가 되고 만 것이다. 상담을 하는 중간 중간에도 은연 중 돈 자랑을 하신다. 필자 왈 “저는 영감님보다도 열배는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제 앞에서 돈 자랑 하지 마세요!” 라고 하니 깜짝 놀라며 존경의 눈빛을 보내신다. “돈이 많으면 뭐합니까? 한 푼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쓰지 못하는 돈은 말 그대로 그림의 떡입니다. 저는 영감님보다 열배는 더 돈을 쓰고 사니까 제가 영감님 보다 열배는 더 부자 아닙니까?” 라고 하니 그제서야 말뜻을 알아차리고 필자를 노려보신다. 참 불쌍한 양반이었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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