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댁에게 굽신거리는 여인
필자의 오래 된 손님 중 50대 중반의 최 여사님이 계시다. 이 분은 남편과 결혼 한지 30년 가까이 되지만 남편과 함께 생활한 기간은 5년이 채 못 된다. 이유는 남편은 항시 작은댁(첩) 집에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 앉는다’ 라는 말이 있는데 최 여사님이 부처님 같은 자비가 있는 분도 아닌데 그 세월을 말없이 참아 온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최 여사님의 남편분이 두 집 살림을 한다고 해서 능력 있는 남자이냐? 결코 아니다. 평생 집에다 생활비 한 번 갖다 준 적이 없다. 그런데 그런 주제에 어찌 두 집 살림을 하는가? 사연은 이렇다.
최 여사님은 지인의 중매로 미국에 살고 있던 남편을 만났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재미교포’는 선망의 대상이어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다니던 초등학교 교사직도 버리고 미국 이민 길에 오른다. 최 여사가 미국에 와서 바로 느낀 점은 ‘아차! 속았다’ 는 것이였다. 한국에서 듣기로는 유통업을 크게 하는 사업가라고 했는데 와서 보니 자바 시장에서 좌판 깔고 노점상을 하는 사람이였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시동생 등 여덟 식구가 조그만 아파트에서 북적거리며 살고 있어 옷 한번 갈아입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미 떠들썩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온 터여서 창피해서 도로 한국으로 돌아 갈수도 없어 지니고 온 돈으로 방을 얻어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한다. 그때 바로 짐 싸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점이 평생의 회한이 됐다. 지참금조로 지니고 온 돈으로 생활을 몇 년 하자 그 돈도 다 떨어져 버렸다. 남편은 책임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능력자였다. 마누라 돈으로 먹고 사는 것이 큰 출세라도 한 양 자랑하고 다니며 무위도식했다. 그러는 사이 아들, 딸 남매도 두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그 꼴에 바람이 났다. 상대방 여자도 팔자가 세서 그랬는지 처녀의 몸으로 애 둘 딸린 유부남에게 끌렸으니 된 통 재수 없는 여자였다. 처음에는 총각행세를 해서 몰랐다고 하며 최 여사를 만난 자리에서 처연하게 눈물을 흘리는데 최 여사께서는 괴씸하기는 커녕 이 아가씨가 불쌍하고 자기 신세도 불쌍해서 서로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이 아가씨의 경우도 상대가 유부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임신중이였고 자신의 종교적 양심상 낙태는 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딸 하나를 낳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작은댁이 된 이 아가씨는 재물 운이 있었던지 조그맣게 시작한 일식당이 무척이나 잘 되었고 손대는 부동산마다 큰 폭으로 올라 무척이나 부유해졌다. 이러다보니 남편은 작은댁에서 작은 부인 뒷바라지하며 거의 살다시피 되었고 작은 부인은 최 여사님과 남매에게서 남편이자 아빠를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큰집의 생활비 일체를 충분히 대 주었다. 큰댁의 자녀들도 자기의 자식처럼 신경을 써주고 옷을 사줘도 고급 옷이요, 철마다 몸에 좋다는 한약이며 성장탕 등등 정성이 지극했다. 최 여사는 이런 작은댁의 정성에 감동이 되어 서로가 사이좋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남편과는 부부로서 남남과 같이 되었지만 명목상의 남편이요, 아이들의 아빠로서만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런 묘한 관계 속에서 작은댁의 발언권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점점 강화 되었고 이제는 두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자 지도자가 되었다. 중요한 결정은 당연히 작은댁의 권한이었고 점차 시시콜콜한 결정마저도 작은댁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모양새가 되어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작년에 최 여사의 외아들이자 막내가 결혼을 해야 하는데 신부가 신랑 댁에 인사를 드리러 올 때도 작은댁에 가서 결혼 허락을 받고나서야 친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오는 식이였다. 점점 작은댁이 본마누라가 되고 본처인 최 여사님이 첩살이 또는 시집살이 하는 꼴이 되고만 것이다. 허나 능력 없는 최 여사님으로서는 이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서글픔은 딸애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을때에도 반복된다. 아기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최 여사님은 이름을 오랜 인연이 있는 필자에게 부탁하고 싶은데 작은댁은 한국에 자신이 아는 분에게 작명을 하자고 강요하다시피 하자 결국은 작은댁의 의사대로 결정되었다. 필자에게 작명을 부탁하겠다고 약속한 뒤인지라 곤란해진 최 여사님이 와서 필자에게 양해를 구하며 큰 한숨을 쉬며 하던 말이 기억난다. “휴! 작은댁 눈치보며 시집살이 하는 본처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아이구~ 이년의 팔자야~” 참으로 기묘한 가족 히스토리였다.
필자가 상담을 하다보면 이렇듯 일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부생활을 해나가는 분들을 간혹 볼 수 있었는데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여자분이 두 명의 남편을 거느리고 사는 경우였다. 이 여자분 또한 위의 경우처럼 능력 있는 여자분이었는데 이분의 본 남편(본부라고 해야 하나? 본처처럼?)은 역시나 능력이 없는 분이었고, 성격이 여성적이어서 아이들 뒷바라지하며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본가에서 알뜰하게 살림을 잘 꾸려 나갔고 정부인 젊은 남편은 이 여성분의 사업체가 있는 이곳 LA 고급콘도에서 주중(週中) 남편으로 이 여성분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살고 있었다. 즉 주중에는 젊은 남편과 즐기며 LA에서 생활하였고 주말에는 본가에 가서 본남편과 아이들과 오붓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두 집 살림을 하면서도 양쪽 집 생활비를 충분히 충당해주니 본남편이나 샛서방이나 둘 다 큰 불만 없이 생활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 투기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었다. 살다보니 별 희한한 경우도 많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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