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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석 삼년만 참으라!

2021.02.03




                     석 삼년만 참으라!    


 옛적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너무나도 가혹하여 눈물 속에 세월을 보낸 며느리들이 많았다. 이상하게도 가혹한 시집살이를 겪어낸 며느리들 일수록 자기 자신이 더욱더 가혹한 시집살이를 시키는 시어머니가 되었다. 거듭되는 악순환이라 할 것이다. 지금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군 생활 쫄병 시절을 혹독히 치러낸 신병이 고참 이 되었을 때 신병들에게 더욱더 혹독히 시키듯이 ‘내가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으니 나는 나중에 그러지 말아야 겠다’ 는 올바른 생각보다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봐라!’는 앙갚음 식의 생각들을 하는 이가 더 많아서 이런 악순환 현상이 있어왔던 것 같다. 


옛날 시집가는 딸에게 어머니가 손을 꼬~옥 잡고 눈물 지으며 해 주었던 말이 “석 삼년만 참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편해질 것이다.” 라는 말이었다.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장님 삼년이면 고된 시집살이를 이겨낼 수 있다는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 참고 말없이 참아 내고, 듣기 싫은 소리를 귀머거리 마냥 못 들었다 생각하고 참아내고, 보기 싫은 꼴을 보아도 장님이 못 보는것 처럼 못 보았다 생각하고 이렇게 삼년씩을 참으면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어 낼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대략 9년 정도의 시간이면 그 집의 가풍과 집안 대소사를 치루는 법을 익힐 수 있고 이때쯤이면 아이도 몇 명이 생기었기에 시어머니가 보기에도 이제는 며느리가 영~신통치 못한 초보자에서 완전한 주부의 모습으로 보여 믿고 살림을 맡길 수 있기에 이 정도의 시간이 지낸 뒤 곳간 열쇠를 며느리에게 넘겨주고 뒷방 늙은이가 되어 손주들의 재롱이나 보며 사는 것이 관례라 할 수 있었다. 또한 한 번 곳간 열쇠를 넘기면 절대로 살림살이에 대해 ‘감 놔라 콩 놔라’ 참견하지 않았다. 이제 살림살이는 며느리의 전권이 된 것이다. 즉 家權인수인계에 혹독한 9년의 세월이 걸리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송 여인이 처음 필자를 찾은 것은 약 8~9년 전 쯤이다. 처음 왔을 때 아직 어린애처럼 동안을 지닌 새색시였는데 이제는 완연한 주부 티가 나는 이이다. 송 여인은 이곳 미국에 유학을 와 있다가 이곳에서 태어난 남편을 만나 미국에서 결혼하고 정착하였다. 따라서 이곳 미국에는 일가붙이 하나 없는 홀 홀 단신 이었다. 결혼 당시 친정아버지는 모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 중이었고 어머니는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써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혼 당시 친정집이 너무 한미(?)하다고 설움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송 여인의 시아버지는 젊은 시절 미국에 이민 오셔서 갖은 고생 끝에 큰 사업체를 일구어 낸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꽤나 알려진 성공한 실업가셨다. 남편은 이런 집안의 외아들이어서 시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자신감은 대단했는데 겨우(?) 은행 지점장 정도의 딸에 불과한 송 여인이 눈에 차지 않았다. 실제로 시어미니 왈 “ 장관 딸하고 선을 보고도 퇴짜를 놓았던 우리 아들인데 아니 세상에 눈이 삐었지 하필이면 유학생하고 눈이 맞아서 이 난리가 뭐냐?” 며 송 여인을 퇴박 주었다. 


이런저런 문제로 몇 번이나 결혼을 때려치우려고 했으나 두 사람의 사랑이 너무 깊었기에 참고 참아서 겨우 결혼에 이르렀다. 시아버지는 매우 사려가 깊고 점잖은 분이여서 이런 시어머니를 여러 번 나무라고 타일렀으나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이러던 중 친정아버지가 휴가를 내서 미국에 오셔서 시아버지를 만났고 두 분 다 인격이 높으신 분들이어서 쉽게 의기투합,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 결혼식 날 당일까지도 시어머니 입이 댓발은 나왔다고 한다. 아무튼 겨우겨우 결혼은 이루어졌고 예상했던 대로 시어머니의 가혹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시아버지의 적극적인 옹호와 남편의 절대적인 사랑이 없었다면 견디어 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이 무렵 필자를 찾아와 눈물을 쏟으며 물었던 말이 “선생님 어떡하면 좋나요? 시어머니가 이 정도일 줄 알았다면 결혼을 안했을 거예요! 엉~엉~ 한국에서도 유별나게 크게 결혼식을 올렸고 미국에 와서도 또 한번 예식을 올려놓고 이제 와서 못 산다고 할 수도 없고, 우리아빠 체면도 있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으니 어쩌면 좋아요?” 어린애처럼 앳돼 보이는 이가 이러고 있으니 필자도 딸을 가진 애비로써 마음이 싸~했다. 대단한(?) 아들이니 유세부리는 것은 애교로 봐 준다 쳐도 시어머니의 행패는 그 정도가 심한 것 같았다. 송 여인이 남편의 사랑으로 이를 견디어 낸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 같았다. ‘내 자식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는 것을 전혀 못 느끼는 행패였다. 송 여인의 하소연을 다 듣고 난 뒤 필자 왈 “이 문제는 혼자서 끙끙 앓으며 고민할게 아니라 송 양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부모님의 의견에 따르는게 좋을것 같군요. 무조건 참는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부모님께서 많이 걱정하시겠지만 지금 이 문제에 대해 정확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군요” 라고 충고해 주었다. 


이후 송 여인의 아버지가 미국에 오셔서 송 여인의 시아버지와 담판을 지어 이때부터 송 여인과 남편은 따로 집을 얻어 시부모님으로 부터 독립하여 살게 되었는데 이후에도 시어머니와의 고부갈등 문제로 필자를 찾아와 ‘신세한탄’을 하다가곤 했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좀 안정되고 시원하다고 했다. 이래서 송 여인과의 상담을 주로 “들어주는 상담”이 되고 말았다. 필자가 상담을 하다보면 이렇게 ‘들어주는 상담’이 약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게 된다. 이런분들의 경우 필자에게 꼭 어떤 문제에 대해 답을 듣기보다는 그저 ‘이야기 들어주는 푸근한 아저씨’ 정도의 역할이 필자의 합당한 상담태도가 된다. 


아무튼 송 여인에게 필자가 주로 해 준 이야기가 “시어머니 밉다고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버릴 수는 없지 않느냐? 석 삼년만 참으라!” 였는데 지금까지도 그러고 있다. 송 여인의 시어머니 되시는 분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당신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악담이 아니라 아직 시집 안간 당신 막내딸이 시집가서 그 후한을 다 받으면 어쩌려구 그 모양이시오? 정신 차리세요! 뿌린 대로 거둔답니다. 이제 석 삼년 다 채웠으니 그만 하는게 좋을꺼요. 그냥! 콱!”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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