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隱禪師(백은선사)
옛날 옛적 한 고을에 백은선사 란 이름 높은 고승이 살았다. 학식이 높고 도를 깨우쳐 세상에 모르는 이치가 없으니 그 마을의 최고 어른 대접을 받았고 중대차한 일에서 사소한 일까지도 꼭 여쭙고 행하는 자가 많았다. 일종의 인생 상담소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 스님은 역서(易書)에도 조예가 깊어 사람의 앞날을 예측함에 있어 어긋남이 없으니 그 마을뿐만 아니라 먼 지방에서 까지 선사를 친견하려는 자들로 거처는 항시 북적였다.
이 마을에는 임치관 이라고 하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는바 임치관 역시 선사의 큰 도력을 존경하여 믿고 의지하며 따랐다. 임치관은 불행 하게도 아들이 생기지 않고 오직 무남독녀 외동딸 만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이 부잣집 외동딸이 바람이 났다. 상대는 불행히도 그 집의 머슴이었다. 아주 오래전 어떤 떠돌이가 이 집에 근본을 알 수 없는 사내아이를 맡기고는 찾아가지 않아 자연스레 이집에 머물다 하인이 된 아이가 바로 이 머슴이었다. 신분에 맞잖게 부잣집 도련님 마냥 뿌옇게 잘 생긴 머슴에게 마음을 뺏긴 것이다. 그리고는 관계가 깊어져 임신까지 하게 되었다. 딸은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 그냥 죽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백은선사를 찾았다.
딸의 고민을 듣고 난 선사는 ‘네가 죽으면 니 목숨뿐만 아니라 뱃속의 아이까지도 죽이는 것이니 그 죄가 배가된다. 니가 니 애비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그 머슴이 니 애비 손에 죽을 것인 즉 그 아이가 나의 씨라고 해라’ 딸이 생각해보니 마을의 모든이들과 애비의 극심한 존경을 받는 백은 선사이니 아비가 어쩌지 못할 것 같아 묘안이라 생각하고 그리하였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지만 집안 창피한 일이라 쉬쉬하다 딸이 출산을 하자 그 애를 포대기에 싸가지고 백은선사를 찾아가 아기를 내동댕이 치며 “이 죽일 놈의 자식아 니 자식이니 니가 키워라. 이 더러운 중놈아” 욕에 욕을 더하여 선사의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하나 둘 사람들 입에 이 사실이 퍼져갔다. 후에 자식까지 데리고 탁발을 하러 온 백은선사에게 온 마을 사람들은 침을 뱉고 때리기 까지 하였다. 곡식은 떨어지고 오명은 세상에 가득차 유랑걸식을 하게 되었다. 모든 누명을 뒤집어쓰고 아이하나 키우며 살아가는 선사에게 머슴과 외동딸은 울음을 삼키며 속죄하고 또 속죄 했으나 달리 길이 없었다. 이러던 중 세상이 바뀌었다. 흉폭한 왕의 폭정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반정에 나서 임금을 쫓아내고 새 임금을 세웠다. 이후 어느 날 부잣집에 서울서 들이닥친 관리들이 머슴을 교자에 태우고 사라졌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그냥 멍하니 바라 볼 수 밖에 없었고 머슴도 얼떨결에 실려 갔다. 후에 밝혀진 사실은 그 머슴은 이씨 왕가의 자손이었고 새로 등극한 임금은 머슴과 한 일가붙이였다 한다.
옛적 당파의 정쟁이 심할 때 머슴 내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집안의 한 측근이 집안의 씨만은 남겨보려고 머슴을 끌고 이리저리 떠돌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잣집에 이 왕손을 맡기고 떠나게 되었고 이 왕손이 머슴이 되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과 낭군을 졸지에 잃어버린 부잣집 외동딸은 늙은 중놈과 붙어먹은 년이라고 가뜩이나 사람들의 멸시와 비아냥에 상심하여 왔던 터에 더욱더 좌절하여 목을 매려 하였으나 주변 사람들 에게 매번 발견되어 죽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러던 세월이 조금 흐른 뒤 그 머슴이 큰 갓에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시종 여럿을 거느리고 부잣집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그가 누구인지 몰라보던 임치관은 사연을 듣고 난 뒤 왕손 앞에 부복하였다. 또 옛적 백은선사에게 버리듯 두고 온 아이가 이 왕손의 씨앗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왕손은 신분의 처지 상 문중의 눈치를 보아야 하니 정식 부인으로는 데려갈 수 없으나 첩실로라도 데려가게 해 달라고 임치관 에게 호소하였고 시골 부자에 불과한 임치관은 감읍할 뿐이었다. 왕손은 백은선사를 찾아 아이를 되돌려 받았고 그동안의 노고와 양육에 대해 보상하려 하였으나 선사는 끝내 거절하였다. 왕손과 외동딸 또 그들의 아이는 서울에 올라가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이 소문은 그 동네는 물론 온 나라에 떠들썩하게 퍼졌다.
존경받던 고승에서 하루아침에 색욕의 파렴치한으로 몰려 무수한 멸시와 조롱 그리고 구타와 허기에 시달리던 백은선사는 더더욱 고명 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 떠들어 대었다. ‘백은선사께서 득도(得道)를 하신분이라서 앞날을 훤히 짚어보고 이리 될 줄 알고 그 업을 뒤집어썼으니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야’ 일면 ‘그런 소리 하지 말게! 백은선사께서는 마음이 하해같이 넓고 측은지심이 강한 분이여서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세 사람의 생명을 구하신 게지 자기 이름 높이려고 그리 하셨겠나?’ 왈가왈부 말들이 많았지만 아무튼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존경받을 일이였다. 임치관과 마을 사람들은 백은선사를 찾아가 그동안의 실수를 크게 사과하고 보답하고 보상하려 했으나 선사는 거절하였다. 그러면서 왈 “이보시게들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잡지 말라 했거늘 무슨 큰일이라고 호들갑인가? 한번 사는 세상 이리 사나 저리 사나 매냥 같은 것이거늘 무엇이 잘한 일이고 무엇이 못한 일이란 말인가? 모든 것이 인연의 업보로다! 업보!” 라 했다한다...... 오늘 문득 백은선사와 비슷한 삶을 사셨던 하늘에 계신 스승님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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