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감래(苦盡甘來) -행운의 사나이-
‘고진감래’ 라는 말이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다. 세상이치가 다 그러하듯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K씨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빠짐없이 필자를 찾아와 의논을 하시는 분이시다. 이분은 경남 창원분이다. 창원에서 한참 떨어진 궁박한 면소재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면서기 여서 생계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이분이 기생출신의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첩의 자식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본가(本家)의 큰어머님은 딸만 여섯을 두신 자애로운 분이셨다. 친어머니보다 오히려 큰어머님이 더욱 K씨를 위하셨다. 어찌 보면 큰어머님의 권유로 아버지가 첩을 얻어 아들을 얻고 첩살림을 차린 것이나 다름없다 한다.
아무튼 본가에 가면 큰어머니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아이구 우리집안 귀한아들 K왔구나! 어서 들어 오너라” 하며 반기셨고 곶감이며 꿀 등 귀하고 맛난 것을 깊이 숨겨두셨다가 먹이곤 했는데 옆에서 누이들이 뺏어먹을라 치면 눈을 치뜨시고 “우리집안 귀한 아들 K먹일 것도 모자라는데 니년들 같은 가시나들이 어딜 넘보나? 저리못가나? 콱!” 하시며 누이들을 쫓아내곤 했다. 엄마와 K씨가 사는 면소재지에서 본가의 큰어머니가 사시는 집은 걸어서 반나절 거리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일주일의 반은 본가에 가서 지내셨다한다. 이 지역인근은 산세가 험한 큰 산이 있었는바 6.25전쟁 전부터 빨치산이 산에 살면서 밤이면 마을에 내려와 분탕질을 하곤 했는데 6.25나던 해 봄 어느 날 깊은 밤 갑자기 들이닥친 빨치산들에 의해 마침 본가에서 주무시던 아버지가 즉결 처분으로 총살되는 변고가 있었다 한다.
이때부터 집은 급속히 쇠락해갔는데 이사이 어머니는 면에 사는 한량기 많은 지주와 눈이 맞아 그 집의 첩 자리로 옮겨 앉았고, K를 본가의 큰어머니에게 패대기치듯 맡기고 첩살이 떠났다. 하기사 친엄마가 K씨를 데려간다고 해도 줄 큰 어머니도 아니었다. 아무튼 그나마 쇠락해가는 집에 손위 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시집을 갈 때마다 살림살이는 더더욱 쪼그라 들어만 가더니 급기야 밥을 굶을 지경에 이르렀다 한다. 피밥도 못 먹을 지경에 큰어머니는 생병이 생겨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 아마도 영양실조로 인한 사망인 듯했다. 전쟁 통에 고아아닌 고아가 된 K씨는 이리저리 흘러 다니다 부산에서 꼬마거지가 되었다.
거지들에게 붙잡혀 ‘각설이 타령’ 등을 급하게 교육(?)받고 동냥하러 다니는 거지가 된 것이다. 거지생활 끝에 머리가 조금 커지자 구두닦이 통을 들고 이른바 ‘슈샨보이’가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K씨는 학업에 대한 열정을 놓치지 않았다. 틈틈이 독학으로 학업을 해나갔고 야학에 등록하고 일이 끝나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코피까지 쏟아가며 공부를 한다. 이때 K씨에게 苦盡甘來 가 온다. 먼 친척 뻘되는 아저씨가 미군부대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분이 K씨를 데려다가 미군부대에 취직을 시켜준 것이다. 취직이래야 처음에는 밥만 얻어먹는 정도에서 만족해야했다. 처음에는 미군들 잔심부름 해주는 일부터 시작하여 접시를 닦는 하우스 보이가 되자 월급도 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하우스보이 이기는 했으나 이른바 ‘군속’신분이 된 것이다.
영어를 죽어라 하고 열심히 익혔다. 나중에는 정식 경비원이 되었다. 당시 미군은 유통기간이 지난 깡통이나 씨레이션 BOX 등을 땅에 즉시즉시 묻어 버렸는데, 밤에 이것을 파내서 시장에 내다팔아 버는 돈이 막대했고 월급여도 일반 직장인들의 월급보다 10배 이상 많아 미군부대 군속은 지금으로 치면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 직원인 것처럼 ‘꿈의 직장’이였다. 실제 면에서는 그것을 능가했다 해서 미군부대에 몇 년 다니면 집을 몇 채씩이나 척척 사곤 했다한다. 이러다 우연한 기회에 인연이 닿아 UN에서 파견 나온 한 여성 외교관의 운전기사가 되었다. 미 군대에서 틈틈이 정비기술과 운전을 배운 것을 써먹게 된 것이다. 영어는 점점 더 늘었다. 독학을 했으나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K씨가 공무원이 되는 기회를 얻은 것은 실로 우연이었다.
운전도 잘하고 영어실력이 있는 사람을 보사부 마약반에서 뽑고 있었는데 시험 없는 특채였다. 여기에 K씨가 뽑히게 된다. 당시 양담배 단속과 마약단속을 보사부에서 하고 있었는데 외국인과 접촉이 많고 영어에 능숙한 K씨가 적격이 된 것이다. 행운은 연이어 이어진다. 보사부 마약단속 업무가 검찰청에 이관되면서 K씨는 팔자에 없는 검찰청 수사관이 된 것이다. 당시에 검찰청 수사관 끗발이 대단히 컸는데 비록 특채이긴 하나 근속연수가 오래되자 승진이 되어 마약반 반장이 되어 그 위세가 검사와 맞먹는데 이르렀다. 실재 신임검사들은 K씨에게 함부로 지시 못할 위치에 있게 되고, 오히려 K씨가 훈수내지 지시(?)를 할 정도였다 한다.
정년퇴직을 한 뒤 아들이 사는 미국에 살려고 건너온 K씨는 이제 80이 넘은 노인이 되었지만 미국에 와서도 행운이 계속된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과 한국에서 살던 APT 등 그리고 모아놓은 돈 등을 합쳐서 LA및 그 인근에 APT 몇 동을 사 놓았는데 이것이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득달같이 값이 오른 것이다. 이제 웬만한 준 재벌 소리들을 정도의 재산가가 되었다. 필자가 보니 K씨의 이런 행운은 당분간 계속 될듯했다. -고진감래- 고생 끝에 인생의 큰 낙을 얻은 행운의 사나이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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