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gudowon님의 다른글 더 보기 :: 총 1048
목록 닫기목록닫기 목록 열기목록열기
문화/창작

‘아들 덕 볼 생각마라!’

2021.10.21






                          ‘아들 덕 볼 생각마라!’ 

 

 한국의 유명 소설가 이호철 씨는 진보성향이 강한 작가이다. 이북이 고향인 이씨는 월남 후 박정희 유신시절 민주실천 문인협회 등에 가입하여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고, 이로 인해 옥고도 치루었으며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류 되어 곤혹을 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책벌레인 필자가 그의 소설들을 읽어 보았으나 작가로서의 문장력은 약해 별로 탐탁치 못한 글들이라 판단했지만 어찌 되었든 왕성한 창작력으로 여러 소설을 발표하고 소설계의 원로급 대우를 받는 작가이다. 소설에 대한 소질 보다는 사회 운동가로서의 실천력이 더 뛰어난 작가라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이호철 씨는 어린 시절 외아들로써 꽤나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물론 누이에게도 금지옥엽처럼 대우 받았다. 이호철씨 어머니는 오매불망 아들하나만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저 아이 덕 볼 생각을 털끝만치도 하지 마시오. 우리는 저 아이 덕을 못 볼 것이나 그저 저하나 잘 되라고 빌어 주어야지 덕 볼 생각은 마시오.” 라고 했다한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어서 였는지 아니면 스스로 뭔가 터득한 것이 있어서 였는지 몰라도 늘 그런 소리를 해서 어린 이氏도 어린나이지만 무척이나 섭섭하게 들려 ‘아버지가 왜 날 미워하시나?’ 하며 눈물지었다고 훗날 술회하기도 한다. 


아버지가 자꾸 그런 소리를 하니 어머니도 섭섭하기도 하고 의아한 생각이 들어 어느 날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무꾸리’ 에 나선다. 이氏와 어머니 그리고 유명한 관상쟁이를 소개하는 외숙모 이렇게 셋이서 당시 그 일대에 유명 하다는 관상쟁이를 찾아 나선 것이다. 용하기로 그 일대 명성을 떨치고 있던 그 관상가는 워낙 돈도 많이 벌어 아주 규모가 큰 기와집에 살고 있었다고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이氏는 회상한다. 어린 이호철씨가 앞에 앉자 관상가는 아무 말 없이 자꾸 이씨의 귀만 들여다보고 만지고 또 들여다보고 만지고를 반복하며 아무 말이 없다가 이윽고 왈 


“아하! 그놈 참 귀가 잘 생겼구나! 관이 들었으니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는 문장가가 되겠고, 의식주도 별 문제가 없고 처자식복이 있으니 현모양처에 귀한 자식들을 두겠지만 중년기 이후에 큰 관재구설이 있어 이때를 조심 하여야겠고, 조출 타향 하니 어려서 고향을 떠나 부모형제 하고는 일찍이 인연이 끊어지겠다! 이보시오! 이애는 큰 문장가가 되어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고 의식주도 문제없고 처자식복도 많겠으나 아마도 아주머니 하고는 인연이 짧으니 이 애에게 덕 볼 생각은 아예 마셔야겠소! 쯧쯧쯧 아깝다!” 라고 했다한다. 아버지가 ‘이 애 덕 볼 생각은 털끝만치도 하지마라’ 고 어머니에게 늘 하신 말씀과 똑같은 이야기를 관상가도 했던 것이다. 이 예언은 그대로 실행된다. 


이氏가 의용군에 끌려가 국군과 전투를 벌이고 패퇴 하다가 국군에게 잡혀 잠시 갇혀 있다가 초등학교 선생이면서 아군 측 청년 단장이던 매형의 도움으로 간단히 빠져나와 월남한 때가 19세에서 막 20세 넘어갈 때였고, 이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했으니 조출 타향은 확실히 실행된 것이고, 그 이후 부모님이나 누이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이씨 부모님은 아들 덕은 털끝만치도 못 본 것이니 아들 덕 볼 생각 말라는 것도 확실히 실행된 것이다. 


이후 이氏가 문장으로 문단에 등단하여 여러 문인들과 교류하며 글을 써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으니 세상에 널리 이름을 알리는 문장가가 되기는 된 셈이며, 민주화 문인협회일로 종종 경찰이나 안기부에 끌려가 얻어맞고 감옥살이 했으며, 무엇보다도 중년이지나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류 되어 목숨까지 왔다 갔다 했으니 중년기 이후 큰 관재구설이 있을 터이니 이때를 조심해야 한다고 한 것도 실현된 셈이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무탈하게 가정살림을 이끌어 준 현모양처에 속 썩이는 일없는 자식들이니 처자식 복 있을 거라는 말도 맞는 말이요, 지금이야 다르지만 옛날에는 ‘작가는 가난하다’ 는 일반적인 인식이 있었으나 이氏만큼은 작가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의식주 걱정이 크게 없었으니 이 또한 예언대로 정확히 실현됐다 아니할 수 없다. 


이氏는 인민군으로 전쟁에 나가 전투를 할 때나 패전하여 후퇴하는 과정에서나 늘 남들보다 행운이 있었는데, 이는 오로지 아들 하나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의 ‘가피’ 때문이었다고 한다. 전투가 벌어져 폭탄이 옆에서 그렇게 터졌어도 상처하나 입지 않고 적병과 직접 교우하지 못해 총 한방 쏴 보지 못하고 후퇴 하였으며 인민군 패잔병으로 국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무사히 풀려 나온 것 모두가 어머니의 ‘가피’ 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때 이氏가 보고 겪은 일 중에 제일 황당한 것은 동료 인민군 병사 하나가 적을 저격 하려고 눈가림 자에 눈을 맞추고 막 적을 쏘려는 순간 상대가 먼저 쏴서 그 눈가림 자를 뚫고 적의 총알이 오른쪽 눈에 박힌 병사가 있었는데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이 병사는 응급처치로 위생병이 소금물에 눈을 씻어 주었을 뿐인데도 눈에 총알이 박힌 상태에서 죽지도 않고, 일상적으로 생활 했으며 본인 스스로도 별로 아프지 않다고 했다는 것이다. 


눈에 총알이 박힌 채 태연히 생활하는 이 목격담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믿지 못할 것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 법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믿는다. 예전에 필자가 알던 한 노인 분은 6.25전쟁 때 행군 중 옆에서 폭탄이 터져 모든 이가 다 죽었는데 자신만 긁힌 상처도 없이 멀쩡했다한다. 두고두고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 자신의 앞 뒤 양 옆에 있는 소대원 모두가 창자가 터지고 머리통이 날아가고 다 몰살 했는데, 가운데 있던 자기만 살 일이 없던 것이어서 그러했다. 헌데 노인이 되어 우연한 기회에 머리에 X-레이를 찍어보니 엄지 손가락만한 폭탄 파편이 3개나 박혀 있더란다. 의학적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였다. 이분은 85세에 돌아가셨을 때 까지 이 파편과 함께했다. 특이하게도 별 지장이 없이 살다 가셨다. 아무리 큰 화(禍)를 당해도 죽지 않을 팔자(八字)면 죽지 않는 법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좋아요
태그
인기 포스팅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