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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쪽박 깬 자와 채워 준 자의 운명

2022.01.03

 




              쪽박 깬 자와 채워 준 자의 운명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몰락한 왕족으로서 너무 가난하여 늘 굶주리며 살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보니 세도가집 잔치가 있는 날이면 다 떨어진 도포와 갓을 메고 잔치 집을 흘깃흘깃 눈치를 보며 드나들었다. 음식과 술을 얻어먹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이 눈치를 보는 비루먹은 개새끼 같다하여 ‘상가 집 개’라는 모욕적인 별명까지 얻고 말았다. 흥선군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장안의 걸렁패 들과 어울려 기집질에 투전질 등 왕족의 신분에서 벗어난 망나니짓을 일삼았다. 비록 ‘상가 집 개’같은 몰골이지만 엄연한 왕족 신분이기에 어디에 가든 체면만 내려놓으면 얻어먹고 얻어 마실 수는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떤 이들은 흥선군이 권문세가 김씨 문중세력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한신이 걸렁패들의 다리 밑을 기어드는 심정으로 위장했다 하나 당시 실정으로 보아 흥선군은 견제의 대상이 되고 말고 할 상대도 되지 못했기에 흥선군 측에서 나중에 출세를 한 뒤 이런 과거의 치부를 덮기 위해 만든 말이라 할 수 있다.


1863년 진주민란 직후 조선의 경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가난뱅이 흥선군의 처지는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굶다가 퍼뜩 머리에 떠오른 이가 이조판서 홍종응 이였다. 전에도 몇 번 신세를 진일이 있어 염치가 없었으나 당장 굶어죽게 생겼으니 염치 불구하고 부득이 그의 집을 찾았다. 대문 앞에 이르자 하인들이 나와서 말하기를 “우리 대감마님께서는 근래에 건강이 좋지 못하여 잠시 산정의 사랑에 쉬러가셨습니다. 소인들에게 분부하시기를 아무도 들이지 말 라고 하셨으니 다른 날 다시 오시는 게 좋을듯합니다.” 라고 했다. 흥선군은 자기를 따돌리려고 하는 것임을 알았으나 세모에 날씨가 너무 추운 데다가 배도 고프고 목마름도 심하여 일이 성사되든 안 되든 간에 한번 만나 이야기나 해 봐야겠다고 체면 불구하고 하인들에게 애걸하니 하인들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협문을 열어 들어오게 하였다. 이런 후안무치 뻔뻔한 왕족을 하인들은 벌레를 보듯 경멸 찬 시선으로 비웃었다. 


홍종응 을 드디어 만나 구차 스럽고 비굴한 표정으로 애걸하자 홍종응이 답하기를 “이왕에 몇 번 청구하신 것은 즉시 봉행해 드렸습니다만 지금은 세모를 당하여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날마다 구걸하니 이들을 다 구제해 주기 어렵습니다. 얼마 안 되는 이조판서 봉급으로는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해드리기 어려우니 대감께서 금번에 청하시는 것은 어찌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며 흥선군의 청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해도 흥선군이 문밖을 나설 때 불상사가 생겼다. 뒤를 따라 나온 홍종웅 의 하인이 흥선군이 힘없이 협문을 나서는 순간 발길로 협문의 판자를 걷어찼다. 발로차서 협문을 닫으려한 것이다. 그만큼 흥선군을 멸시했던 것이다. 그런데 협문을 열고 나가던 흥선군의 손이 문짝에 끼고 말았다. 다섯 손가락에 유혈이 낭자한 채 모멸감에 몸을 떨었으나 어찌할 수 없었다. 홍종응의 집에서 그런 수모를 당한 흥선군은 손에 붕대를 감은 채 그길로 서강에 사는 쌀가게 주인 이천일을 찾아갔다. 부득이한 일이였다. 굶어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흥선군을 맞은 이천일은 크게 놀랐다. 정중히 문안을 드린 후에 보니 흥선군의 왼손 다섯 손가락에 피가 엉겨 있었고 그 피가 다 얼어붙어 엉망이었다. 천일이 “어찌하여 이지경이 되셨습니까?” 라고 묻자 “나귀를 모는 아이가 빙판에서 실수하여 떨어져 이리되었다.” 라고 답하였다. 천일이 일일이 손가락 하나하나를 약수로 씻고 손에 깨끗한 붕대로 싸주니 통증이 조금 가셨고 정신이 들었다. 그런 뒤 천일이 “대감께서 어찌하여 이런 누추한 곳까지 행차 하셨습니까?” 라고 물으니 대원군은 “다른 이유는 없고 몇 년 전부터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어왔으나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절기에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네!” 라고 답하였다. 이에 천일이 아뢰기를 “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메모지) 한 장이면 족하실 터인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 하셨습니까? 송구합니다. 염려마시고 돌아가시면 내일아침 일찍 조치해 보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며 오히려 황송해 했다. 


대원군은 집에 돌아왔으나 배가 고프고 추운 데다가 손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이천일은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이 물자를 넉넉히 보내왔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 쌀과 돈 그리고 장작, 고기 등을 받아들고 흥선군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라는 말만 되뇌었다. 그 후 1863년 바로 그해 12월 8일에 젊디젊은 철종이 갑자기 승하하니 적막강산처럼 쓸쓸하던 흥선군의 거처 운현궁에 왕기가 서렸다. 흥선군의 셋째아들 명복이가 고종임금이 되고 흥선군은 대원군이 된 것이다. 살아있는 왕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대원군의 호칭은 권력을 의미했다. 셋째아들 명복이 왕이 되었으나 아직 어리매 대원군이 섭정이 되어 왕 대신 나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즉위식 날 대원군은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운현궁에 특별히 부르고 친히 손을 잡고 인도해 맞아들이니 천일은 떨리고 황공하였다. 이때 고종의 생모인 대원군의 부인 민씨가 궁중의 잔치 상을 내어오게 하고 대원군이 친히 천일의 손을 잡아 상에 앉게 한 뒤 큰 은반에 홍로주 를 가득 부어주니 천일에게는 큰 영광이요, 출세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고난 뒤 운현궁도 초가삼간에서 대궐 같은 기와집으로 탈바꿈 했다. 당시 돈으로 1만7천830냥이 들었다하니 지금으로 치면 수 백 억 원의 공사비가 든 대공사였다. 권력을 잡고난 뒤 흥성대원군이 무엇보다도 먼저한일은 오랜 야인 생활동안 신세진 고마운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었다. 은인 중 하나인 이천일은 선혜청 고직에 임명되니 비록 그 직급은 낮으나 노른자위 자리여서 그 수입이 경상감사의 봉급보다도 많았다. 선을 쌓아 받은 큰 복이었다. 은인들에게 보답을 먼저 한 뒤 손볼 놈들 순서를 정했는데 제일먼저 손볼 놈 대상 1위에 오른 것이 홍종응 이었다. 순간의 판단미스가 목줄을 움켜쥔 것이다. 1863년 세모한날에 있었던 일의 결과가 이렇듯 엄청난 차이를 낳은 것이다. 불과 그해 12월 8일에 철종의 사망 그로인한 대원군의 집권 홍종응 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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