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창작

조출 타향 하니 다시는 그리운 이를 볼 수 없으리라!

2022.02.07

 






                  조출타향 하니 다시는 그리운 이를 볼 수 없으리라!    


 이북이 고향이신 강 선생님은 이북 신의주가 고향이시다. 해방 후 청년단체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하셨고, 집안이 할아버지 때부터 열열한 기독교 신자 집안이여서 교회생활도 열심이었다. 처음에는 종교의 자유도 보장하고 기독교계에 우호적이었던 공산당이 점차 기독교계를 적대시하고 압박을 가해오자 당시 20세 전후의 청년이었던 강 선생님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월남을 하게 된다. 고향집에는 거동이 불편하신 노(老)할머니가 계셔서 어쩔 수 없이 며느리인 강 선생님의 어머니와 누이가 남아 할머니 병수발을 들기로 했다 잠시라 생각했던 이산가족 생활은 영영 이 가족을 갈라놓게 된다. 당시 조혼 풍습이 남아 있던 때라 벌써 강 선생님에게는 아내와 아들하나가 있었지만 홀애비 였던 장인어른이 갑자기 쓰러져 거동을 못하는 바람에 친정에 돌아가 있던 참이라 동행치 못했다. 


아버지는 매우 일찍 개화된 분이여서 서울에도 사업체가 하나 있어 관리인을 두고 경영을 하고 있었는데 이 관리인이 불성실해져 영업이 부진하던 참이라 이래저래 사업도 직접 관장하고 어수선하고 살벌한 고향 분위기도 피할 겸 잠시 가족과 떨어져 있기로 하고 아들하나 데리고 잠시 월남해 있는게 좋겠다는 강 선생님 아버님의 판단이셨다. 이때는 벌써 3‧8선이 있어 남과 북이 갈라져 있었지만 경계가 그리 삼험한 편이 아니라 돈만주면 안내인을 구해 탈 없이 남‧북을 오고 갈 수 있었고 심지어 수도 없이 남북을 들랑거리며 장사하는 이까지도 있었다 한다. 그 후 6‧25전쟁이 터졌고 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서 그곳에 뿌리를 박게 되었다. 이때 강 선생님은 우연히 길을 걷다 군인들에게 강제 징집이 되어 국군이 되었다. 총 쏘는 법 등만 대강대강 2주 정도 교육받고 전투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총 한방 못 쏴보고 부대가 적에게 쫓겨 후퇴하게 되었다. 


후퇴하다가 부대를 잃어버렸고 동료군인 하나와 동행하다 총을 부셔서 개울에 던져버리고 피난을 갔는지 텅 빈 집을 뒤져 옷까지 바꿔 입고 터덜터덜 걸어서 고향집까지 걸어갔다 한다. 몇 년 동안 보지 못한 아들이 돌아오자 어머니는 기뻐서 펄쩍 뛰셨다. 어머니가 정성껏 고은 닭죽도 먹으며 지친 몸을 회복하고 있던 중 갑자기 들이닥친 내무서원들에게 체포돼 갇히고 만다. 몇 년 동안의 종적을 대라고 심한 매질을 당했지만 군인이었다고 하면 즉시 총살될 것이 뻔해 이리저리 장사를 하고 다녔다고 우겼다. 이 때 이웃 면 위원장이었던 사촌 매형의 보증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으나 인민군에 지원하는 조건이었다. 국군병사에서 졸지에 인민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도 전투에 참전했다가 총 한방 못 쏴보고 포로가 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다 풀려나 아버지와 재회했을 때 아버지는 새어머니를 맞아들여 생활하고 계셨고 젊은 새어머니는 동생들 둘까지 낳아 졸지에 자식 같은 동생들이 생겼다. 


하지만 강 선생님은 아버지와는 달리 이제나, 저제나 오랜 세월 가족을 만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젊은 아들 놈 제치고 다시 장가든 아버지는 민망해서 인지 자꾸 아들의 재혼을 권했다. 결국 강 선생님도 재혼을 하게 되었지만 언제나 마음은 고향땅에 있는 새색시와 아들에게 있었다. 재혼한 부인 사이에 4남 3녀를 주렁주렁 두었지만 젖먹이 시절 떨어져 아비 없이 자라며 고생할 첫아들에게 늘 애비로서 미안했다 한다. 이렇게 세월이 흘러흘러 강 선생님도 9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셨다 자식들은 모두 잘되어 분가해서 열심히들 살고 있고 20명이 넘는 손자‧손녀들 이름이 기억이 안날 정도로 자손도 번성했다. 


아들‧딸‧손자‧손녀 중에는 판‧검사, 의사, 사업가, 교수, 기업체 임원, 정치가 등 누구누구하면 알 정도의 명사들도 많이 있을 정도로 이른바 고급 페밀리가 넘쳤다. 나름대로 이제는 어디에다 내놔도 손색이 없는 명문가가 된 것이다. 강 선생님이 미국에 이민 오시게 된 것은 가장 사랑하는 막내딸이 미국인 기업가와 결혼하여 도미했기 때문이다. 막내딸 옆에 살고 싶어 미국행을 결심하자 집안에서 난리가 났다. 그 많은 연세에 왜 고향땅을 놔두고 먼 이국까지 가시냐는 거였다. 이 말에 강 선생님 대답은 이랬다 한다. “고향 땅은 무시기 고향땅이니? 신의주가 내 고향이지 무시기 고향이란 말이니?”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강 선생님 속셈은 따로 있었다. 


통일은 당신 생전에 그른 것 같고 죽기 전에 고향에 있는 처와 아들의 생사라도 알고 싶은데 길이 막혀 있으니 미국에 가면 어떤 길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강 선생님이 처음 필자와 마주했을 때 처음 물었던 말도 자신이 고향의 처자를 생전에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 이였다. 하지만 필자가 쾌를 뽑아보니 ‘조출 타향 하니 다시는 그리운 이를 볼 수 없으리라!’는 쾌가 나와 힘들겠다는 답변을 한바있다. 허나 강 선생님은 필자의 그런 진단에도 불구하고 큰돈을 써가며 고향에 끈을 대어 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매번 헛수고였다. 초조해진 강 선생님은 자신이 너무 늙어 거동마저 못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걷는 힘이라도 있을 때 모험을 해 보기로 결심한다. 모 여행사를 이용해서 북한 관광에 나서게 되었고 개인행동을 금지하는 감시의 눈을 피해 뇌물을 써서 사람을 사서 고향땅에 보냈으나 허사였다 한다. 


큰 욕심도 아니고 생사에 관한 소식이라도 듣고 싶었으나 이마저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고 한다. 난리 통에 폭격 맞고 다 죽어 버린 것은 아닌지? 혹시나 자신이 국군이었다는 것이 탄로나 처형 되었거나 포로수용소에서 남한 행을 택한 사실이 드러나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고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평생을 고생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나이로 보아 부인은 죽었다 해도 아들의 생사 만 이라도 알았으면 하고 발버둥을 쳐보았으나 모든 것이 허사였다 ‘조출 타향 하니 다시는 그리운 이를 볼 수 없으리라’ 던 필자의 쾌대로 되고 만 것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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