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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관상학의 대가 백운학이 만난 이하응

2023.06.17

 

 



           관상학의 대가 백운학이 만난 이하응


 옛부터 우리 선조들은 관상을 매우 중시 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관상은 매우 중요한 역할 을 많이 하는데 전문적으로 관상을 연구하지 않은 일반인들조차 사람을 처음 대면할 때 그이의 상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살피게 된다. 그래서 첫인상이 매우 중요한데 첫 만남에서 대화를 나누기 전 서로의 속내를 알기 전에 상대방에 대한 느낌은 인상에서 받게 된다. 이것이 광의로 보면 관상의 일부 인 것이다. 첫인상에서 좋지 못한 느낌을 받게 되면 장차 그이와의 교류에 있어 장애가 될 것이며 첫인상이 좋다면 그 느낌으로 인하여 장차 교류에 친밀감이 가해져 가까워지는데 일조를 하게 됨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근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관상학의 대가는 이견 없이 백운학 이라는 인물을 들 수 있다. 백운학은 구한말 대원군시대에 활동하던 관상가이다. 경상북도 청도에서 출생하였으며 젊은 시절 청도에 있던 운문사의 일 허 선사에게 관상학을 사사 받았다.


백운학은 한쪽 눈이 먼 애꾸였는데 백운학이 애꾸가 된 사연은 그의 관상학 공부의 처절함을 나타내준다. 일허 선사는 백운학에게 애꾸가 되어야 사람들의 관상을 좀더 자세히 볼수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백운학은 진짜로 자신의 한쪽 눈을 담뱃불로 지져서 애꾸가 되었다. 스승이 제자를 애꾸를 만들려는 의도는 없었으나 백운학은 관상공부를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눈을 지져버렸으니 그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열정으로 관상학공부에 몰두한 백운학은 깊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청도에서 관상 수업을 마치고 임상을 위해 세상을 떠돌던 백운학이 우연히 운현궁을 지나다 집 앞에서 팽이치기 놀이를 하던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이라는 소년을 보게 된다. 당시 명복의 나이는 12세~13세정도 였는데 백운학은 이 소년을 보자마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마침 귀가 중이던 이하응이 이 장면을 보고 의아히 여겨 백운학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연유를 묻자 매우 두려운 듯 온몸을 떨며 애꾸눈을 한참 껌뻑 거리더니 조심스레 "집 앞마당에서 팽이를 치던 저분은 제왕의 상을 지니셨습니다. 그래서 절을 올린 것입니다." 라고 말을 한다. 당시는 김씨 문중의 권문세도가 하늘을 찌르듯 할 때였으며 자기들 마음대로 강화도에서 뛰놀던 선머슴 같던 강화도령을 허수아비 임금(철종)으로 앉혀놓고 정치를 농단하던 때인지라 왕족들이 모두 몸을 숨기거나 숙이고 숨죽여 살던 때이므로 이하응은 백운학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한 뒤 복채를 얼마나 주어야 하냐고 묻자 백운학 왈 "대감마님 댁이 이렇게 영락하셨으니 지금은 복채를 내실 수 없을 것이요 제왕의 상을 본 복채가 작을 수도 없으니 4년 후에 3만 냥을 주십시요" 라고 당당히 요구하였다. 


당시 이하응은 비록 왕족이기는 하나 영락하여 끼니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고 김씨 문중의 잔치 집을 기웃거리며 먹을 것 을 동냥해야 하는 처지여서 김씨 문중 사람들에게 '상가 집 개' 라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통할 정도로 영락한 처지라 사실 작은 돈의 복채라도 내줄만한 형편이 되질 못했다. 당시 돈 3만 냥이면 지금 돈으로 치면 수백억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금액 이었는데 백운학은 비록 후불이지만 이런 거액을 태연히 요구하였다. 대원군은 "너의 말이 사실로 실현 된다면 틀림없이 복채 3만 냥을 내주겠다." 고 약속을 한 뒤 백운학의 요구로 지금의 약속어음과 비슷한 증서를 백운학에게 써주었다. 이때는 사실 대원군 이하응이 궁중을 몰래 드나들며 왕실의 최고 어른격인 대왕대비에게 자신의 존재를 은연중 부각시키던 중이였고 큰 야심을 숨긴 채 일부러 김씨 문중 잔치대소사에 나타나 주책을 부림으로서 김씨문중 사람들이 자신을 형편없는 인간으로 여겨 경계의 대상에서 벗어나려는 치밀한 계획을 진행 중 인 민감한 때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4년 후 백운학은 복채를 받으러 운현궁 대원군집에 나타났다. 이때는 백운학이 예견한대로 명복이는 고종임금이 되어 있었고 대원이대감 이하응은 수렴청정 하는 사실상의 임금이 되어 있었다. 대원군은 약속한 3만 냥보다 몇 배 많은 돈을 백운학에게 주려하자 백운학은 3만냥만 받겠다고 고집하며 호의를 베푸시려면 자신의 고향인 청도현감 벼슬을 달라고 요구하였고 대원군이 이에 응하여 일개 관상쟁이가 일약 현감 벼슬을 얻게 되어 거액의 돈과 벼슬을 가지고 고향 떠 난지 수십 년 만에 금의환향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백운학은 조선팔도 천지에 이름이 알려졌고 현재의 이르러서도 유사 하거나 동일한 이름을 쓰는 수많은 관상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계기가 되었다.(예-백운비, 백운산, 백운도사 등등......)

 

필자의 경우 태어난 연월일시 를 중심으로 하는 사주팔자로 운명을 분석하고 있지만 태어난 시간이 정확치 않을 경우 관상으로 시를 유추해 내는 방법을 쓰고 있고 이 경우 관상이 무척이나 유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태어난 시가 불분명한 사람이 의외로 많은데 이는 요즘과는 달리 시계가 흔치 않던 시절에 태어난 분이 많고 또 여러 자식들을 생산하다 보니 헷갈리는 경우가 많아서 생기는 현상인데 이 경우 인상을 보아 인상에서 용신을 찾아 명 식의 희기를 판단 할 수 있는 정도의 관상학 실력이 요구된다. 또한 자미두수를 쓰면 생시의 차이가 인상이나 성격 기거동작에서 나타나므로 많은 도움이 된다.


요즈음 복채는 적개는 몇 십 불에서 많게는 수 백 불에 해당할 정도로 다양하겠지만 근래에 이처럼 큰 복채를 일시에 수령한 예는 백운학의 경우가 유일하다 할 것이다. 다만 70-80년대 부산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박도사’로 불렸던 제산, 박재현 선생이 삼성재벌가의 창업자이신 고 이병철 회장의 고문으로 몇 년 활동한 뒤 그 보답으로 부산 범어동의 5층 빌딩 한 채를 복채격인 수고비로 받은 일이 있느니 그다음 수준의 기록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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