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뒷바라지에 등골 빠지는 팔자
필자의 고객이신 나여사님은 그야말로 형제 때문에 파란만장한 인생길을 걸어오신 분이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장녀로서 홀어머니와 다섯 동생과 함께 어려운 생계를 해결해야만 했다. 어려서부터 학교급사를 시작으로 유치원보조교사 등등 안 해본 일없이 어렵고도 어렵게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 작은 의류공장 경리로 정식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쥐꼬리 만 한 월급을 쪼개고 쪼개 동생들 뒷바라지와 생활비를 겨우 충당했으나 이름 모를 질병으로 몸져누워계신 어머니의 병원비나 약값 등은 충당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눈물을 머금고 회사근무가 끝나면 유흥업소에서 밤에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이 길은 피하고 싶었으나 이 길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뻔한 이야기대로 쥐꼬리 월급의 주간 직장은 점차 시들해지고 결국에는 야간 유흥업소 직업이 메인이 되었다. 자신은 비록 이렇게 버린 몸(?)이 되었지만 동생들 만큼은 잘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오직 한 가지 일념으로 셋째 여동생 하나만 빼고 (본인이 극구 공부하기를 싫어해 어쩔 수 없었다. ‘니 팔자 니가 알아서 해야지 언니가 어쩌겠니?’하고 난 뒤 셋째의 공부는 고등학교 중퇴로 끝냈다.) 동생들을 모두 대학 마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하였다. 이리하여 나 여사님 6남매의 학력은 대졸 4명 고졸 1명 중졸 1명이 되었다. 이 와중에 어머니는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다행히도 동생들은 나 여사님을 엄마처럼 믿고 따랐다. 다만 중졸인 셋째가 언니 말 안 듣고 중학교 때부터 껌 꽤나 씹고 다니며 말썽이더니 결국 사채업자 밑에서 일수가방 들고 일수똘마니로 근무(?)하는 양아치 건달 놈과 눈이 맞아 동거하다 생각 없이 아이를 세 명이나 연년생으로 낳아놓고 (나 여사 표현대로 라면 싸질러놓고) 일수똘마니는 사채회수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사건으로 교도소가고(나 여사 표현으로는 빵에 가고) 생각 없는 껌좀 씹던 셋째여동생은 ‘언니 정말 미안하지만 돈 벌어 올 동안 애들 좀 맡아줘!’라고 한 뒤 일본에 돈 벌러가서 소식이 없었다.
다행히도 나머지 동생 4명 중 한명은 학교 교사. 두 명은 대기업 회사원 나머지 한명은 간호사가 되어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 나갔고 나 여사님은 이런 모습을 보며 흐믓 했다. 시집도 못가고 조카 3명을 키우자니 분통이 터졌지만 피붙이를 갖다버리지도 못하고 키울 수밖에 없었다. 이모엄마(이모이자엄마)가 된 것이다. 이것들을 키우자니 돈도 많이 필요했는데 전공을 살려 차린 강남에 위치한 작은 카페는 다행히도 수입이 짭짤했다. 아가씨 몇 명 데리고 사장인 나 여사님도 필드에서 직접 뛰면서 매상을 올렸다. 그런데 피는 못 속이는 것인지 껌 씹던 엄마와 일수똘마니 양아치아빠 사이에서 난 세 아이들이 모두다 죄 크면서 말 안 듣고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 여사님 표현대로 라면 ‘그 씨알머리가 어디 가겠어요?’) 다른 동생들 자식들은 죄다 말 잘 듣고 공부도 잘하는데 비해 유독 자신이 맡아 키우는 셋째 여동생 자식들만 말썽이니 그럴 만도 했다. 엄마아빠 없이 이모 밑에서 자라는 환경 때문인가? 하는 생각에 온갖 정성을 다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셋 다 (위로 둘은 사내아이고 막내만 여자아이였다.)공부하고 담쌓은 것은 물론이고 하나씩 특유의 장기(주 전공 이라해야 하나?)가 있었다. 첫째아이는 성격이 포악하고 폭력적 이여서 툭하면 애들을 패서 보호자인 이모 나여사가 툭하면 학교에 불려가게 하더니 결국 힘이 무척이나 쎈 검사아들을 패서 소년원에가게 되었고 둘째는 용돈을 항상 넉넉하게 주는데도 불구하고 도벽이 있어 급우들의 지갑과 귀중품을 툭하면 훔쳤다. 결국 지 학교 교장실까지 털다가 경비아저씨에게 잡혀 퇴학당하고 말았다. 막내인 계집아이는 끼 많은 지엄마를 닮아서 학교는 툭하면 빠지고 남자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며 못된 짓을 일삼더니 결국 열세살 어린나이에 덜컥 임신을 하고 말았다. 셋째여동생에 이어 그 셋째여동생 자식들마저도 대를 이어 나 여사님을 괴롭게 하는 선수들 이었던 것이다. 골머리를 앓던 나 여사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려준 이는 늘그막에 만난 남편 이였다.
LA와 한국을 오가며 기계무역을 하던 상처한 중늙은이가 나 여사님 카페의 단골이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함께 여생을 보내기로 했고 나 여사님은 LA로 이민 오게 된다. 말썽쟁이 3남매는 이제 다른 동생들의 짐 덩어리가 됐다. 이제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볼 수 있는 때가 드디어 오개 된 것이다. 하지만 이곳 LA에 와서도 세 말썽쟁이들의 소식을 안 들을 수 없었고, 결국 신경을 끊을 수는 없어 이런저런 일이 생기면 필자에게 달려와 그 결과가 어떻게 될 지 묻곤 하게 된 것이다. 사주팔자에 있어 형제 복 여부는 일주(日柱)와 오행이 동기(同氣)인 비견. 겁재와 월주의 동태(動態)에 의하여 판단한다. 하지만 원래 월주는 부모 궁 이므로 형제 복 여부의 판단에 있어서는 그 중점을 어디까지나 사주상의 비견 및 겁재의 성쇄 및 길신인지 기신인지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 필자가 나 여사님의 사주팔자를 처음 보았을 때 관살이 경미하고 식신. 상관이 왕성하며 사주에 비겁이 있어 식상을 생하는 구조였는데 이런 구조를 지닌 사주팔자는 형제 때문에 큰 피해를 입거나 형제로 인해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으로 보는데 나 여사님 사주가 전형적인 이런 사주구성 이였다.
나 여사님 사주팔자를 보고 필자가 처음 꺼낸 말이. “사주팔자로 보아 부모덕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더 큰 문제는 형제들 인데 형제들 때문에 일생을 희생해야하는 고단한 팔자가 되었군요!”라고 하니 시원시원하고 화통한 성격대로 큰소리로 “아이고! 세상에 팔자는 못 속인다고 하더니 내가 꼭 그 짝 이군요! 아이고 내 팔자야!”라고 하며 한탄하셨다. 자신의 사주팔자대로 자수성가는 할 수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평생을 자신의 팔자대로 형제들 뒷바라지와 뒷감당에 시달려온 나 여사님 이였다. 허나 어느 누구나 그러하듯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있는 법! 소심하고 고지식한 꽁생원이기는 하지만 매우 성실하고 나 여사님만을 공주님처럼 위해주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 지긋지긋한 뒷바라지 인생을 훌훌 털어버리고 LA로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니 이것이 나 여사님의 인생 터닝 포인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 거리로 가족들과 떨어지기는 했으나 ‘피는 어쩔 수 없다.’는 말처럼 천리타향 이곳에 와서도 세 명의 말썽쟁이 조카들의 이런저런 사고소식에 마음 졸여하는 나 여사님이 안타까웠다. 형제 뒷바라지에 평생 등꼴 빠지는 한 여인의 사연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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