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성모 마리아의 집과 성 요한 교회(터키)

2018.02.01


성모 마리아의 집과 성 요한 교회



에페스(에베소)


유적을 모두 둘러 본 후, 가야할 곳이 두 군데 더 있다.
바로, 성 요한 교회(Aziz Yahya Kilisesi)와 성모 마리아의 집(Meryemana)이다.
성 요한 교회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성 요한을 추모해 4세기쯤 지은 교회다.
4세기 당시에 지은 교회는 대리석이 아닌 목조 건물이었다.
그 후 기독교 교세가 확산되면서 536년부터 565년까지 29년 동안에 걸쳐 대리석으로 다시 건축했다.
성 요한 교회를 20개의 문이 있는 웅장한 교회로 건축한 사람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비잔틴움 제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교회에 대한 열정과 헌신으로 동방정교회와 루터란 교회로 부터 성인 칭호를 받은바 있는 대제.
비잔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성 소피아 성당을 건축한 것도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다.
그러나 성 요한 교회는 1330년 아랍군에 의해, 1402년에는 몽골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다.
성 요한 교회로 들어 가려면 먼저 박해의 문(Gate of Persecution)을 통과해야 한다.
박해의 문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정성으로 세워진 문이다.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용서, 정성으로 세워진 박해의 문(Gate of Persecution)


기독교가 공인된 후, 교회가 지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이지역 주민들은 기쁨과 함께
사랑하는 가족들을 박해하며 살인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사람들은 살인자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고 요한의 무덤 앞에 돌을 쌓았다.
그리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야수의 먹이로 던져져 처형당한 한을 잊지 않도록
원형경기장에서 석재를 떼어내 와, 무덤에 쌓인 돌과 함께 박해의 문을 세운 것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 가면 참회자나 세례자들을 위해 사용됐던 나르텍스(Narthex)가 나온다.
나르텍스는 교회 본당 입구와 복도 사이에 설치된 현관 문으로 폐쇄된 공간이다.




나르텍스(Narthex)



교회에서 가장 성스러운 곳은 요한의 시신이 묻혀있는 성 요한의 무덤이다.
요한의 무덤은 교회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는 바닥과 기둥 4개만 남아있다.
요한은 두 차례에 걸쳐 에페스에 온 것으로 전해진다.
한 번은 서기 37년에서 48년 사이, 마리아를 모시고 와 성모가 선종할 때까지 모시고 살았다.
서기 95년에는 로마제국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파트모스(밧모) 섬으로 유배됐던 요한은
그 곳에서 요한게시록을 저술하다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에페스로 귀환했다.
‘사랑은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요, 사랑만 있으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성 요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 보물 창고


교회에서 담장을 따라 조금 구석진데로 걸어 가니 나무로 지어진 작은 예배당이 하나 보였다.
바로, 4세기경에 지어진 예배당으로 보물 창고(Hazine Dairesi)였다.
자물통으로 굳게 잠겨진 보물 창고 안에는 성 요한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고 한다 .
성 요한 교회 바로 아래 들판에는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이 세워져 있던 매우 역사적인 곳이다.
아르테미스는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처녀성의 여신이다.
20개가 넘는 유방을 가지고 있어,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으로 고대인들은 보았다.



20개가 넘는 유방을 가지고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이 워낙 웅장하고, 여신의 신통력이 특별해 멀리 인도에서도 참배객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옛날의 웅대한 신전의 모습은 찿아 볼 수 없고 지금은 흰 기둥만 하나 외롭게 서 있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는 로마 신화의 다이아나(Diana)와 동격이다.
요한복음, 요한서신(1신, 2신, 3신), 요한계시록을 집필한 저자로 알려진 성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용감한 사도였다.
예수님은 임종하기 직전, 마리아와 요한을 내려다 보며..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라고, 마리아에게 말했으며, 요한에게는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 라고 부탁해, 요한은 평생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요한 19,26-27).
그래서였을까? 사도들중에는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았다고 전해져 내려 오고 있는 인물이다.




앞 중앙에 보이는 것이 바닥과 기둥 4개만 남아있는 성 요한의 무덤이다


뷜뷜산(Bülbül Dağı)에 자리 잡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을 찿았다.
이 집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에페스에 정착해 선종할 때까지(A.D. 37-48) 살았던 곳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고 가뭄까지 극심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떠났는데,
그 때 요한도 마리아를 모시고 안타키아를 거쳐 에페스로 온 것이다.
환상을 통해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한 사람은 독일인 수녀 안나 카타리나 엠머릭.
엠머릭은 교황청에 의해 공식적인 시복 절차를 통해 복녀(Beatification)의 칭호를 받은 성녀다.
클레멘스 브렌타노가 1878년에 펴낸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책에 의하면,
엠머릭 수녀는 ‘병상에서 마리아의 환상을 보고, 꿈속에서 살던 집을 보았다.’라고 말한다.
이를 근거로 1881년, 프랑스 사제가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했지만 주목받지는 못했다.
10년후, 프랑스의 마리 드 망다 그랑시 수녀와 두 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그 건물을 재발견했다.
폐허가 되어 지붕도 없는 돌집이었지만, 주민들에게는 오랫동안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성모 마리아가 선종하는 날까지 살았다고 하는 성모 마리아의 집


그 곳 주민들은 초대 교회 시절 에페스에 살던 그리스도인의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터키어로 동정녀의 문간(Panaya Kapulu)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랑시 수녀는 이곳 성모 마리아의 집에 조그마한 가톨릭 성당을 하나 세웠으며
1915년 선종할 때까지 마리아의 집과 그 주변을 매입해 복구 및 보존하는 일에 매진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51년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 마리아의 집을 성지로 지위 격상시켰으며,
이러한 지위와 특권은 나중에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공고히 확정됐다.
성지로 알려진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방문한 카롤릭 교황은 지금까지 모두 3명.
1967년 7월 26일에 교황 바오로 6세,
1979년 11월 30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2006년 11월 29일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다.




소원을 적고 묶어 놓은 성모 마리아의 집 언덕 아래에 있는 담벼락


성모 마리아의 집 언덕에서 앞을 바라 보면 에게해가 한 눈에 보인다.
에게해는 지중해를 만나게 되고 지중해는 예루살렘이 있는 이스라엘 땅과 연결된다.
마리아는 에게해를 바라 보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매일매일 생각했을 것이다.
고통속에 죽어 가는 아들을 바라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숨을 거둔지 3일만에 부활하셨다.
성모 마리아는 선종하는 날까지..
요한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성 요한이 요한복음 11장 25절과 26절에 기록한 글이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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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의 집과 성 요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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