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목사의 세상사는 이야기 (2025)
큰 형님이 보내어 준 편지 (Oct. 12, 2025)
우리 아버지와 우리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못한 무학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남 사천군의 고동포라는 어촌 마을이었고, 우리 어머니는 경남 하동군의 북천면에 있는 농촌이었다. 전깃불도 들어 오지 않는 깡촌 출신이라 농사해서 먹고 살기에 바빠 학교에 갈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골장터에서 만난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20대 총각이던 아버지와 16살 처녀이던 어머니의 혼사를 시키기로 한 결과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결혼하여 아들 둘, 딸 둘을 낳고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았지만, 깡촌 시골에서 자식들을 살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큰 도시인 마산으로 일거리를 찾아 이주를 했다고 한다. 마산 중성동에서 셋방을 살다가, 구마산 역전근방에 있던 시부지이던 공터에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집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우리 부모님은 이미 아들 둘, 딸 셋을 낳았기 때문에, 나를 잉태했을 때에는, 우리 어머니가 가난한 집에 또 아기가 생긴 것이 부담이 되어 병원에 가서 유산을 하려고 아버지의 누님이신 고모님에게 가서 상담도 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아이 유산시키려다가, 어른까지 죽을 수도 있으니, 유산은 위험하다. 다 지 먹을 것은 타고 난다. 아이를 낳으라”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말을 했으며,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내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가 네살 때 암으로 돌아 가셨으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어머니는 “어찌해서라도 살릴려고 했는데”도 아버지를 살리지 못했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에게, “처군아, 처군아, 내 명이 이것 밖에 안되니, 어찌 하겠느냐? 이제 자식들은 모두 너 차지이니,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아라”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머니는 열아홉살이던 장남부터 두살 짜리 막내까지 일곱 아이들을 먹이고 입혀야 하는 무거운 책임감에 “앞날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었다”는 말을 하던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열아홉이던 큰 형님은 요즘 말로 하면, 조현병이나 양극성 정동장애 정신병으로 부산대학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정신이 불안정 했다고 한다. 장남이 정신이 온전치 못해 걱정이던 어머니는 죽은 남편의 동생인 삼촌에게 상담을 하러 갔더니, 삼촌은, “정신병은 못 고친다. 살짝 쥐약을 먹여 죽여 버려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차마 자식을 죽일 수 없어, 삼촌의 조언을 무시하고 경남 군북에 있는 조용한 절에 큰 형님을 맡겨 두고 요양을 시켰다고 한다. 다소 회복이 된 큰 형님은 마산에 돌아와 창동에 있던, 부산 가는 버스 주차장에서 휴게점을 시작했으나, 알콜 중독에 빠져 번 돈을 모두 술 마시는데 낭비하고 말았다.
그때 아버지의 누님이던 큰 고모님이 큰 형님에게, “너는 아버지도 죽고 안 계시니, 교회에 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살아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고 한다. 큰 형님은 교회에 나가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온 가족을 교회로 인도했다.
술과 담배를 끊고, 주일은 교회에서 하루 종일 살았고, 주일날은 돈도 못 쓰게 했다. 마산 선창에서 고기상자를 리어카로 배달하는 막노동을 하면서도 십일조를 철저히 드렸고, 돈이 없으면 빚을 내어 교회에 헌금을 드려서 담임 전도사님이 강대상에서, “일을 해서 번 돈으로 가족을 부양해야지, 조선생처럼 교회에 다 바쳐 버리는 것은 올바른 헌금생활이 아니니 그러지 말라”는 설교를 하던 것을 들은 기억이 난다.
큰 형님이 한번은 부흥회에 다녀와서는, “감리교회에 네형제가 목사가 된 집이 있단다. 우리도 네형제이니 모두 목사가 되자”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때 열 살 이었는데, 가장이던 형님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앞으로 목사가 되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때 실과시간에서 배운 토끼를 기르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하얀 토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검은 토끼, 노란 토끼들까지 여덟마리를 나 혼자 키웠다. 토끼를 키우던 것을 본 큰 형님이 나한테, “너는 앞으로 넓은 세상에 나가 백인들, 흑인들, 황색인등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가 되어라”는 덕담을 해 주었다.
가난한 형편이라 대학에 갈 돈이 없었지만, 큰 형님이 심어준 희망과 포부의 씨가 내 마음 속에 떨어 졌다. 나는 고등학교때 조영남씨가 불렀던, “내 고향 충청도”의 노래를 통해 충청도 양반들이 살던 대전에 있는 목원대학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감독으로 은퇴하신 석준모 목사님이, “나는 동아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목원대학 신학대학에 가서 전도사가 되었다. 목원대학은 종합대학이라 단과대학인 신학대학 보다 폭이 넓고, 미국 감리교회에서 보내어 주는 장학금 때문에 학생들의 등록금이 다른 신학대학 보다 저렴하니, 목원대학에 추천한다.”고 하여, 나는 목원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입학시험에 합격은 하였으나, 입학금을 마련할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당시 마산 중앙감리교회에서 청소와 관리일을 하던 큰 형님이 은행에 가서 돈을 빌려 내 입학금을 내어 주었다. 내 형편을 알던 큰 형님은 “니 입학금으로 융자받은 돈은 니가 갚아라”는 말을 하지 않길래 나는 부담은 없었지만, 형님에게 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나는 목원대학에 입학하여 두번째 학기때 처음으로 성적장학금을 받았다. 등록금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받은 나는, 그 장학금 전부를 큰 형님께 보내어 드렸다. 큰 형님은 당시 경남 고성의 미자립 시골 교회의 가난한 전도사로 있었는데, 뜻 밖에 큰 돈을 받고 무척 감동을 받았던지, 나한테 편지를 보내어 왔다.
나는 학교 수업전에 큰 형님의 편지를 받고 교실에서 큰 형님의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정래야, 나는 중학교 밖에 마치지 못하여 무허가 신학교를 거쳐 미자립 시골교회에서 가난하게 목회하고 있지만, 너는 정규 신학대학에 다니고 있으니, 앞으로 열심히 해서 미국이나 독일로 유학을 가서,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는 교수나, 훌륭한 목회자가 되길 바란다.”하는 격려의 덕담을 해 주었다.
큰 형님은 시골 교회에서 교인들 열명을 앞에 두고 설교할 때도, “이 교회에서 앞으로 세계적이고 국제적인 인물들이 배출되기를 기도한다”라는 말을 종종 했다. 돈 한푼 들지 않는 말이었지만,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는 말이었다.
막연히 유학을 동경하던 내 마음에 형님의 축복 어린 덕담이 불을 붙인 것 같았다. 나는 목원대학의 영어 웅변대회에 도전하여 최우수상을 받고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고, 강원도 인제 원통 철책선 부대에서 3년간의 군목생활을 마치고, SMU의 Perkins 신학대학원에서 주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 유학와 지금은 미국인 연합감리교회의 정회원으로 30년 가까이 목회하고 있다.
이제 생활이 안정되어 여유가 있어서, 아내는 왕복 비행기표를 보내어 주며, 한국에 사는 큰 형님 부부, 누님 부부, 홀아비가 된 둘째 자형, 과부가 된 큰 누님과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조카등 일곱 사람을 초청하여, 이번 주말에 우리 집에 이주간 여행을 오게 된다.
내가 미국에 유학 와서, 미국인 교회에서 목회하며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고 있는 것은 큰 형님이 어렸을 때 과대망상적이고, 허황된 말인, “너는 앞으로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목사가 되라”는 말이 씨가 되어, 비록 유명한 목사는 못 되었으나, 마산 촌놈인 내가 미국인 교회에서 설교하며 살고 있는 것은 작은 기적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