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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창작

효자 나무꾼과 꽃사슴(명당이야기)

2021.02.10

 




                 효자 나무꾼과 꽃사슴(명당이야기)  



 옛날 기자 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基準)이 위만에게 쫓기어 경기도 이천 효양산(孝養山)아래 터를 잡은 뒤 그의 칠대 손 만주(蔓周)가 살고 있었는데 홀어머니를 모시고 궁핍한 살림을 땔 나무꾼으로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었다. 이러다보니 나이 40이 넘어도 장가를 들지 못했다. 효심은 지극하여 어머니 공양에는 정성을 다했는데 하루 두 짐을 하는 나무로는 돈을 모으기는커녕 고기 한 근 어머니께 사드리지 못했다. 이것이 항상 안타까웠다. 해서 가끔 눈먼 토끼라도 만나야만 어머니께 고기 맛을 보게 해 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꽃사슴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그의 지게 앞에 푹 꼬꾸라졌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사슴을 덥치니 사슴은 옆구리에 화살 하나가 박혀있어 도망갈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이었던 것이다. 


 양심에 꺼렸지만 만주는 재빨리 사슴을 나뭇단 밑에 숨겼다. 이윽고 사냥꾼 두 사람이 헐레벌떡 쫓아와 사슴의 행방을 물었다. 어머니께 드릴 고기를 놓칠 수는 없어 만주는 거짓말로 이들을 따돌렸다. 이윽고 사슴을 잡아서 어머니께 드리려고 낫을 들고 자세히 사슴을 보니 배가 불룩한 새끼를 밴 암사슴이었다. 문득 어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새끼 밴 짐승은 그게 쥐나 뱀이라도 잡아서는 못쓴다. 새끼 밴 것은 절대 건드리는게 아니다! 천벌을 받는다!” 아까왔지만 화살을 뽑아내고 자신의 옷을 찢어서 그 속에 누빈 솜을 꺼내 상처에 대고 싸매주었다. 사슴이 혀로 그의 손등을 핥는다. 고맙다는 표시였다. 그날 밤 만주가 꿈을 꾸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산신령이 나타나서 “그대가 내 딸과 손자들을 구해주었으니 은혜를 갚겠다. 그리고 아까 내 딸이 쓰러졌던 그 자리에 그대가 죽으면 거기에 묻히라! 대대로 자손이 번성하리라” 라고 하였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서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효양산으로 사냥을 나와 만주의 초가에 당도하여 길 안내를 부탁했다. 만주는 정성을 다해 사흘간 왕을 성심껏 모셨고 왕은 만족했다. 왕이 만주의 소원을 물으니 “노모를 편히 모시는 것 뿐입니다.” 라고 답하였고 왕은 “효성이 갸륵하니 상을 내리겠다.” 라 한 뒤 만주에게 성을 주고 벼슬자리를 주었다. 해서 만주는 서씨(徐氏)의 시조가 되었고 늦장가를 들어 아들 필(弼)을 낳았고 필은 아버지 만주를 아버지 뜻에 따라 ‘꽃사슴이 쓰러졌던 지게 밑 그 자리’에 묻었다. 필은 그 후 창업한 고려국 광종 때 높은 벼슬에 올랐고 그의 아들 희(熙)는 성종 때 검교 병부상서에 까지 올랐다. 이이가 거란 침략 때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한 서희 장군이다. 서씨 가문은 대대로 발복하였는데 달성(達城) 서씨는 바로 이 이천 서씨의 분파로써 육조판서를 두루 역임한 서거정(徐居正)같은 인물을 배출한다. 이후 숙종 때는 참판급 이상의 벼슬을 지낸 이 만도 서른 명이 넘는 명문가 중 명문가가 되었다. 하나의 작은 선업으로 명당자리를 얻어 한 가문을 세울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묘를 잘못 써서 패가망신한 예도 있다. 동래정씨 집안의 한 분파 이야기인데 동래정씨는 조선조 3대 문벌이었다. 이 집에서는 한 대에 금관자,옥관자가 한 말 이상 나온다고 할 정도였다. 관자는 조선시대 정 3품 이상의 고관들이 망건에 달아 당줄을 꾀는 고리인데 정 3품 통정대부급은 옥관자 종2품 정헌,자헌 대부이상급이 금관자를 달은 데서 나온 말이다. 이렇듯 명문 중에 명문이었던 이 집이 망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 때 정참판의 과욕 때문이었다. 정참판은 아버지 때에 축척한 재물이 만석꾼에 이르렀으며 그 힘을 입은 정참판은 일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김제에 있는 사금광(砂金鑛)을 운영하여 억만금을 벌만큼 이재(理財)와 처세에 능한 사람이다. 이재와 처세에는 밝았지만 자신과 문중에 대한 욕심만 강했지 국가나 국왕에 대한 충성심 또는 주변인들에 대한 동정심과 배려심은 없는 욕심 많은 사람이었던것 같다. 소작인들에게 가혹하게 소출을 강요했고 장리쌀을 놓아 엄격하게 징수했다. 이러다보니 주위에 원성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가가 집에 와서 독립운동자금을 요구했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주재소에 신고하여 오히려 체포 당할뻔하게 만들어 이를 응징하려고 몇몇의 독립군 암살단이 노렸으나 워낙 돈이 많아 자체 경비단을 집주위에 겹겹이 두고 일본경찰에서도 정참판이 지역 세도가인지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어 순사가 매일 밤 순찰을 돌아 거듭 실패 할 수밖에 없었다한다. 정참판이 노린 것은 무엄하게도 ‘왕도’였다. 정감록을 신봉한 그는 자신의 집안에서 왕도가 열리리라 믿었다. 그래서 명당 중 명당 즉 왕후장상의 터를 노리고 이를 찾기 위해 유명하다는 지관들을 큰돈을 들여 불러서 전국 명산요지요소를 돌게 하였다. 그런 터를 찾는 지관에게는 천석지기의 땅과 만금을 주겠다고 공언하고 명당 터 찾기에 열중하였다. 


 드디어 명당 중의 명당이라는 터를 조선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지관이 발견하였고 드디어 정참판은 죽은 뒤 이곳에 묻혔다. 물론 그 지관이 큰 부자가 된 것은 당연하다. 허나 이러한 명당 중 명당은 그 지기가 너무나도 강하여 웬만큼 공덕을 쌓은 이가 아니면 이곳에 묻힐 자격이 없다 한다. 자격 없는 이가 이런 곳에 묻힐 경우 오히려 흉터로 변해 명당 중 명당이 아니라 흉지(凶地)중 흉지가 된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이후 정씨 가문에는 흉사가 겹쳐 한세대가 다 지나기 전에 남자라는 남자는 모두 요절하였고 여자는 모두가 과부 아니면 창기가 되었고 그 많던 재산은 바람에 겨가 날리듯 순식간에 흩어져버렸는데 정참판의 남자 자손 중 한명이 겨우 남아서 6.25때 월북하였고 그 후 그를 정치범 강제수용소에서 언뜻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 그 후는 알 수 없다 한다. 세상의 모든 길흉은 사람의 마음에서 연유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하는 이야기다. 쓰는 이에 따라 독약이 보약이 될 수 있고 보약이 독약이 될 수도 있음이다. 


자료제공:  GU DO  WON  (철학원)

213-487-6295, 213-999-0640

주소: 2140 W. Olympic  Blvd #224

Los Angeles, CA 9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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